이름은 삼라만상 모든 물상의 대표성을 담보하는 기호이며, 총체적 본질을 파악하는 위상어이다. “명심보감” ‘성심’편에도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며,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 하여, “하늘은 쓸모없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지 않으며, 땅은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를 자라게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다. 발에 밟히는 풀 한 포기조차 그만이 지니는 존재적 가치의 이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의 대표 시 ‘꽃’에서처럼 개인이든, 조직이든 어떤 단체든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사람, 그 회사 또는 그 단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명분과 체통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한국인들이 자식의 이름이나, 상호, 부서명칭 등에 깊이 천착하는 현실은 어쩌면 당연한 사회적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2013년 한 해 동안 법원에 접수된 개명신청건만 20만 건이 넘었다니, 철학관이란 간판을 달고 신생아 이름과 상호작명, 개명 등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겠다. 예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써서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개인의 개명이야 뭐라 하겠나만, 문제는 국민 다수의 편의와 이해가 걸린 정부부처의 명칭이나 관공서 또는 그 산하 조직의 명칭도 끊임없이 바뀐다는 데에 있다. 김영삼 정부의 유일한 치적이라는,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부터, 역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부처의 명칭이 신생, 사멸, 개명의 무수한 되풀이를 반복한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여성가족부’를 지칭하는 건 아니나, 시대상황에 따라 반드시 새로운 부처가 탄생치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보아도 그 이름이 그 이름인 것 같은 명칭도 있는가 하면, 도대체 무얼 하는 곳인지를 가름조차 할 수도 없는 부처의 명칭도 많은 것 같다. 박근혜정부도 ‘미래창조과학부’를 신설하고,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꾼데 이어, ‘해양수산부’를 신설하였다. ‘미래창조과학부’라니,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추상적인 정부조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미래를 과학적으로 창조해 나가자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이전의 과학기술 주무부처는 미래에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게 아닌가? ‘행정안전부’가 ‘안전행정부’로 된 것은 안전을 우선하겠다는 의중일 터이지만, 안전을 글자 앞머리로 돌리지 않으면 안전엔 불감증이 되는 건지, 개명에 따른 직접비용과 혼란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일지 알 수가 없다. 미국과 일본의 국무성이나, 대장성, 문부성, 후생성 등등은 정부수립 이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들의 국가시스템이 부처명칭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 정부 부처 중 명칭이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것은 국방부가 유일한 것 같은데, 다음 정권에서는 이 또한 ‘국토방위지원부’ 같은 명칭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교육청’이 ‘교육지원청’이 되어 간판과 표지석 바꾸는 작업을 하는 걸 보았다. 교육청과 교육지원청.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걸까? 교육청은 일제의 잔재로 권위의 교육행정만 펼쳤고, 교육지원청은 그야말로 애정으로 보살피는 지원행정만 하고 있을 터이다(?)  지금 시군의 읍면동사무소란 명칭 때문에 주민이 불편하고 행정이 꼬이는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인데, ‘주민지원센터’라 불러야만 시대를 앞서가는 행정이 되나보다. 앞으로 시군청도 ‘시·군민지원 청’으로 바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정영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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