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가는 동안이 길게’라는 의미의 ‘오래’는 낡은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속에서 사람과 함께 켜켜이 묵은 감동을 전하는 깊은 통찰로 다가온다.
세월의 힘과 시간성의 누적이 다시 현대인들의 정서를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쉬이 변치 않음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인 것 같다. 그래서 생활사적으로는 골동품점, 헌책방 등 오래된 향기와 품격으로 와 닿는다. 며칠 전, 불국사 주차장 인근(경주시 진현로)의 오래된 식당 한 곳을 찾았다. 장어탕으로 유명한 집이었는데 평소 장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다, 어탕이라는 메뉴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딱 한 번만 먹어보라’는 지인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장어탕을 맛보게 되었다. 내가 이 식당에 들어가기 망설인 이유는 어탕이라는 메뉴도 메뉴였지만 불국사 인근 오래된 식당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깔려있었던 듯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그저 그런 식당이려니 여겼던 생각은 그러나, 기우였다. 진하지만 맑고 깊은 맛의 장어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는 정성이 담긴 건강한 밥상을 대접받은듯해 기분까지 좋아졌다. 그제야 이 가게가 30년이 넘은 노포였다는 사실과 지역민이 인정하는 맛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노포(老鋪,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의 시간성은 자연스레 근·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노포는 미래 우리의 문화적 먹거리로도 작동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자산이기 때문이다.고도 경주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산재해있으나 한 곳에서 40~50년을 우직하게 장사를 한 ‘오래된 가게’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특히 경주는 문화재 관련 철거로 전문 직종들이 이동을 하는 바람에 경주를 증언하며 저마다 소중한 풍경을 자랑했던 가게들이 더욱 귀한 편이다.노포의 주인 대부분은 청춘을 바쳐 우직하게 일 한 이들로, 베테랑 기술자거나 장인이거나 혹은 경주를 대표하는 ‘명물’ 들이다. 격변의 현대사를 지나며 이 가게들은 비교적 건재했지만, 시류에 밀리거나 트렌드를 쫓아 시간성이 희석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경주 오릉교 앞 경주시민자전차상회, 건천대장간, 감포선구점, 월성자동차정비공장, 학교 앞 삼우문구점, 표구점 삼선방, 송화슈퍼, 남광목공소 등의 노포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가게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낡은 동네 정미소,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던 정겨운 이발소, 경주시내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전소리사’, 구두를 직접 제작하는 수제화점, 맞춤 양복점, 황오동 제재소, 팔우정 해장국 가게 등 경주 노포들은 많다.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백년가게’라는 이름으로 업력 30년 이상의 소상인 및 중·소기업 중 성장 잠재력이 높은 업체를 발굴해 백 년 이상 존속 성장할 수 있도록 육성하고 성공모델을 확산하기 위해 선정하고 있다. 경주에는 1호점으로, 1974년부터 운영해온 숙영민속식당을 비롯, 경주 영양숯불갈비 등 지금까지 14개의 업체가 선정돼 있다고 한다. ‘시민 각자가 열심히 살면 그것이 결국 관광이 된다’. 오래된 가게들에 대한 존중이 시급하다. 그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금씩은 개선되고 있지만 더욱 발굴해 존중하고 지원하는 양식이 필요하다. 낡은 가게들이 사라지는 것은 장소와 업종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우리들 추억과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이다.선진 외국의 경우, 수 대에 걸쳐 한 장소에서 운영하는 오래된 가게는 그 도시의 자랑거리다. ‘오래되면 구식’이 아니라 경주의 역사를 끌어안은 오래된 가게들을 통해 이제 도시재생의 차원에서 새로운 미래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유와 시간이 담긴 장소성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상품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경주 속 오래된 가게에 대한 환기와 오래된 도시 조직 유지를 통해 고도(古都)의 정취를 배가시킬 수 있는 장치로서, 장소성에 주목하는 두터운 가게 지층에 대해 더욱 고민해야 한다. 100년, 200년 된 가게들이 현대적 미감의 가게들과 나란히 하는 경주, 이만큼 매력적인 관광상품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