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등단한 20대 중반에 처음 만났을 때의 황동규(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시인은 3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20대 초반에 등단해 지성파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와는 반세기 가까이 가장 따르는 문단 선배로 그 관계를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이태 전에는 내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동행한 적이 있다. 몇 차례 쉬면서 느리게 사당동 그가 사는 아파트까지 갔다. 그때 나와 승용차로 함께 장거리 여행하기는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른다고 해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화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80대 중반인 그와 여태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지 못했고, 이따금 전화 통화를 하거나 드물게 서울에서 만나고 있을 따름이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따끈한 오뎅 안주로/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잘 가거라./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왜 힘들여 갈라지겠는가?/허허. -황동규 시 ‘이별 없는 시대’ 전문 오랜 친구로 미국에 사는 마종기 시인과의 이별을 다룬 이 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인생의 종점이라는 초조하고 각박한 시간대를 살아가는 자신을 푸근하고 넉넉하게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의 이별은 아주 가까운 친구와 살아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이별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냈다.
  그러나 시인은 이 같은 힘든 상황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린다.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보다 /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박테리아가 “쾌락이 없다면 / 왜 힘들여” 둘로 갈라지겠느냐는 기발한 전복적 상상력을 펼침으로써 고통스러운 이별을 무화시키고 있다. 마지막 행의 “허허”라는 웃음소리는 밝고 환한 목소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고통스런 신음의 상태는 벗어나 있다.
  시인은 이렇게 발상의 전환을 통해 친구가 떠나고, 행동거지가 불편해지고, 생활반경이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식으로나마 나름대로 ‘사는 기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사는 기쁨’의 ‘시인의 말’에서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고 짧게 단 한 문장만 썼다. 표사에서도 “시를 쓰다가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한다. 한밤중에 깨어 볼펜을 들 때가 특히 그렇다. 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 주위에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가득 찬 잔만큼 아직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 한다. 벌레 문 자국 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라고 쓰고 있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을/꿈이라 불렀던가?//작은 강물/언제 바다에 닿았는지/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소리만 들리는,/끝이 따로 없는,//누군가 조용히/풍경 속으로 들어온다/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황동규 시 ‘홀로움’ 전문 외로움의 존재론적 의미를 ‘홀로움’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승화시킨 시다. 내적 사유에 의해 그가 새로 만들어낸 말인 ‘홀로움’은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움’만이 아니고 ‘환해진 외로움’이라고 깨달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적막 속의 홀로인 외로움으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누군가 조용히 들어오고 하늘가에 하나 돋아난 별이 말을 걸어오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홀로 있는 외로움이 환해지는 시인의 꿈은 그윽하게 아름답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