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노자(老子)는 ‘사람은 땅(지구)의 질서를 따르고, 땅은 하늘의 질서를 따르며, 하늘은 도의 질서를 따르되, 도는 자연의 스스로 그러한 질서를 따른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그의 ‘도덕경’ 제25장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 인간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문제들을 다루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통틀어 일컫는 기초학문이 중시되고 바탕이 되지 않으면 모든 학문이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일찍이 노자는 간파했던 것 같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물리학자인 스노도 비과학자가 ‘자연의 자발적 과정은 우주 천체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열역학 제2 법칙을 모르면 과학자가 셰익스피어를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 비극이라고 한 말도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사의 중요한 화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신의 섭리로만 믿어왔던 자연의 원리들이 속속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지식의 형태로 밝혀지면서 과학은 날이 갈수록 인간 사회 전반에 가장 광범위하고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터넷, 생명 복제, 우주 개척, 물질 재창조 등으로 인간 생활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부작용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생명 복제에 따르는 윤리적 문제,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 생태계 파괴 등은 위험의 징후들이 아닐 수 없다.
이젠 과학이 인간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 문화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양상으로 진전되고 있다. 이 두 문화는 상호 소통조차 어려워지는 이질화로 치닫고 있으므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꾸는 인문적 가치와 욕구 실현의 물질적 실용성의 조화가 요구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자연과학도 문학, 사상, 철학, 역사적 상상력 없이는 발전하기 어렵다. 자연과학 이론이 인문학 발전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과학의 새 지평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반열에 든 우리나라의 당면한 과제는 창의력을 요구하는 독자적인 기술의 추구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이 하는 일을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대신해주는 편리한 4차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작곡까지 하는 뛰어난 성능의 3세대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가 등장하면서 AI에 먹히지 않을 인간 최후의 보루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재평가되기도 한다. '왜 인문학적인 감각인가'의 저자 조지 앤더스는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방향과 갈피를 잡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4차산업혁명의 중심지인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두 가지 부류의 전문가가 있다고 한다. 자연과학이나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기술쟁이(techie)’와 문학, 철학, 역사는 물론 사회학에도 심취한 인문쟁이(fuzzy)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기술적 소양만 충만한 사람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사람을 최고의 인재로 여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스티브 잡스다. 그가 말했던 인문학은 인류가 갖춰야 할 기본적 교양인 ‘리버럴 아츠’다. 그는 가슴 뛰는 결과물은 기술이 인문학, 인본주의와 결합이 될 때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인문학적 소양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지식을 쌓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정교한 로봇이 모든 일을 대신해준다고 해도 우리의 삶까지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적인 작업까지 대신해주는 인공지능이 대세가 되면 관찰하고 사고하고 유추하고 구성하는 인간 본연의 논리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도 퇴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변되는 4차산업혁명의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는 물론 후대들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AI시대를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