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가면 정사(鄭賜)의 묘가 있는데 부산시 진구 양정동에 있는 동래정씨 시조 정문도의 묘와 함께 조선의 8대 명당에 속하는 곳이다. 옛날부터 동래정씨는 명당에 묘를 잘 쓰기로 유명한 집안으로 시조 정문도의 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할 만큼 대단하다. 이에 못지않게 동래정씨 13세손인 정사의 묘소도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의 명당으로 이름난 곳이고 우리나라 풍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다녀갔을 법한 자리다. 옥녀단좌형이란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단정히 앉아있는 형국을 말하는데 묘혈은 여자의 자궁에 해당하는 곳이다. 정사의 묘소가 이곳에 정해진 이유가 야사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진주목사로 재직 중 사망하자 고향인 예천 용궁에다 장사지내려고 배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현지에 도착하니 명당 터에는 이미 누군가가 장사를 지내기 위해 산역을 하고 있었다. 한걸음 늦었구나 생각하면서 현장에 올라보니 광중에는 물이 차올랐고 그들은 장사를 포기하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들이 떠난 후 정사의 일행과 같이 온 지관은 광중의 물이 건수임을 확인하고 묘역 아래에 세 곳의 구덩이를 파니 그곳으로 물이 빠져나왔으며 광중은 차차 굳어져 그곳에다 정사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사(1400~1453)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1420(세종 2)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직제학,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영의정 정굉필 등과 함께 봉안되었다. 또한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인 난종의 후손들이 크게 발복한다. 정난종은 우찬성을 역임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정승과 문과급제자 123명이나 나왔고 그의 아들 정광필은 성종 때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손자 정창연은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냈다. 풍수가에선 그 이유를 정사의 묘소에 이어 경기도 군포 수라산에 있는 난종의 묘소가 다른 형제들의 묘보다 훨씬 좋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조선의 3대 명문가라해도 손색이 없는 동래정씨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해낸 주요 원인은 바로 풍수지리를 생활화하여 조선의 8대 명당을 두 곳이나 차지할 만큼 조상들을 명당에 모신 덕택으로 믿고 있다.
  이 묘소의 주산은 안동의 학가산에서 남서쪽으로 가지를 뻗어 내려오다가 연화산을 만들고 다시 떨어졌다가 과협을 거쳐 주산인 옥녀봉을 만들었다. 옥녀봉은 둥근 금형체이고 혈장의 청룡과 백호는 대체로 묘역을 잘 감싸고 있다. 묘소 좌우의 내청룡과 내백호 역시 혈장을 감싸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사내를 유혹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 조산인 비봉산은 호탕한 사내가 춤을 추며 여자를 바라보는 형상으로 혈장과 음양의 짝이 되니 형국론으론 옥녀단좌형이라 부른다. 혈장은 오목한 와형에 속하지만 양쪽 개각이 있어 겸혈로 보는 이도 있다. 물은 좌선수가 향(向)을 지나 곤신(坤申)방으로 빠지고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을 놓았으니 88향법으로도 정묘향이므로 장수와 더불어 부귀가 동시에 보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