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학자이며 기인으로 이름난 토정 이지함(1517~1578) 선생의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 27-3번지에 모셔져있다. 그는 살아생전 토정비결이란 책을 저술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토정비결 하면 이지함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민족들은 과거부터 새해가 되면 간절한 소망과 더불어 한해의 운수를 보고 싶어 했고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기반으로 구성된 점술로 하늘과 땅 그리고 자신의 기운이 어느 쪽으로 흐르는지를 알아내어 나쁜 기운을 미리 방어해보자는데 목적을 둔 비결서다. 
 
그는 화담 서경덕(徐敬德)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천문, 지리, 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나 평생 벼슬을 사양하다가 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57세인 선조 6년(1573)에 경기도 포천현감이 되었다. 그런 후 60세인 선조 9년(1576)에는 충청도 아산현감으로 재직 시 걸인청(乞人廳)을 지어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쓰다가 선조 11년(1578) 재임 중에 사망하였고 사 후 이조판서에 추층 되었다. 영조 37년(1761) 문강공(文簡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보령 화암서원에 배향되어있다. 이지함은 한산이씨 출신으로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6대손이고 그의 아버지 이치(李穉)는 의금부 도사와 수원 판관을 지냈으며 어머니도 명문가문으로 보령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광산 김 씨 출신이었다.
 
토정 이지함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는 부모와 형제를 비롯해 무려 14기나 모셔져 있다. 제일 위쪽에 부모님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에 아들 3형제가 나란히 있다. 가운데가 맏이 이지번, 동쪽으로는 중형 이지무, 서쪽에는 이지함의 묘소가 있다. 토정은 이곳에 집안의 묫자리를 정하면서 “우리 삼형제의 후손들 중 일품의 벼슬을 하는 사람이 나올 것” 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한다. 예언대로 맏형의 아들 이산해가 영의정을, 중형의 아들이 판서를 역임했으며 후에 추증된 것까지 하면 그의 예언은 빗나가지 않고 딱 맞아 떨어졌다. 토정은 자라면서 맏형 이지번에게 많은 의지와 보살핌을 받았다. 
 
이곳의 용맥은 금북정맥의 오서산(790m)에서 지현굴곡을 하며 계속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배재산(289m)을 지나 고정리 마을 뒷산에 이른다. 묘소 주변에는 야트막한 산세들이 사방을 감싸며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안산은 활모양을 한 면궁사 모양이며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다. 이곳에는 14기나 모셔진 넓은 혈장이지만 어느 산이나 맥로가 통과하는 지점은 그리 넓지 않다. 이 혈장에서는 부모님의 산소가 지맥이 통과하는 중심지점이고 그 다음이 바로 밑에 모셔진 큰 아들 이지번의 묘이고 그다음 중형의 묘소는 약간의 맥이 지나가는 곳이지만 막내 이지함이 묻혀있는 곳은 맥로를 완전 벗어난 지점으로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토정이 생전에 자리를 정하면서 형들을 먼저 좋은 위치에 모시고 나는 정혈처를 벗어나도 그 흉함을 감수할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손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에 올랐고 중형의 아들 이산보는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나 본인 이지함의 세 아들은 모두가 요절하거나 병사로 일찍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