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만화책 한권이 눈에 띄었다.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진 만화책이 그것이다. 겉표지가 재질이 두껍고 칼라 사진까지 인쇄돼 매우 고급스럽다. 버리기엔 아까워 이것을 주워왔다. 그리곤 책장을 펼쳤다. 책 페이지마다 건강 지식에 대한 내용에 따른 삽화를 곁들였다. 그래서인지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게 매우 인상적이다. 가령‘미네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엔 귀여운 여자 아이 모습이 만화 속에 그려져 말 주머니에 내용을 담아 답을 알려 준다. ‘미네랄은 사람 몸에 꼭 필요한 것이나 인체에 많이 필요하진 않지만 매우 중요한 영양소’라고 친절히 말이다.
  이 만화책을 대하자 20 여 년 전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 권의 만화책이 돌연 경매 시장에 나왔었기 때문이다. 이 만화책은 당시 1,700만원이라는 고가가 매겨졌었다. 1946년 김용환이 그린‘토끼와 원숭이’란 만화책이었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 토끼는 성품이 유순하고 온순한 우리 민족의 증표로, 원숭이는 난폭하고 잔인한 외세를 상징했다고나 할까. 이 만화가 경매 시장에 나오자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이 이 책을 사들여 현재 소장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만화책을 새삼 떠올리노라니 우리나라 최초 만화에 대한 유래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1909년도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삽화로써, 이는 화가 이도영이 일본 침략의 야욕을 질타하는 의미가 담긴 계몽 만화였다. 필자가 처음으로 만화를 읽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였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다니러 간 외가에서다. 그곳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만화를 대한 것이다.
 
시골 외가엔 후미진 곳에 화장실이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요즘처럼 현대식 양변기가 놓인 깔끔한 화장실이 아니었다. 둥글게 만든 큰 시멘트 통을 땅 속 깊이 묻었다. 그리곤 그 위에 나무판자를 어설프게 발판으로 얹어서 만든 화장실이었다. 이런 열악한 변소 환경은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까지 진동하게 풍기곤 했다. 어디 이뿐인가. 현대처럼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 변소 벽에 박힌 대못에 헌 신문지 쪼가리나 아님 누렇게 색이 바랜 잡지 등을 꽂아 휴지로 사용하였다.
 
여름 어느 날 그날따라 배가 몹시 아파 외가 화장실을 급히 찾게 됐다. 이날 볼일을 보며 무심코 눈앞에 박힌 대못에 꽂힌 휴지를 살펴봤다. 아무렇게나 찢어서 못에 걸린 신문 쪼가리다. 이것 한 쪽 면엔 ‘고바우 영감’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만화가 그려져 눈길을 끌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 내용을 읽어봤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한 올 뿐인 안경 쓴 노인이 등장하는 4컷짜리 만화였다.
  훗날 안 일이지만 그 때 그 ‘고바우 영감’ 만화는 김성환 화백이 그린 것이었다. 1950년 한창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 김성환 화백은 19세 나이에 다락방에서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동아 일보에 게재되면서 당시 자유당 시절 정권을 비판하는 풍자를 하여 인기를 모았다. 촌철살인적인 내용으로 때론 웃음을 선사해온 고바우 영감이다. 이 만화를 신문에서 만날 때마다 서민들은 고달픈 삶을 위무 받기도 하였다. 훗날 소설가 선우휘는 이를 두고,“ 국민이 고바우 영감을 읽으며 작은 저항의 웃음을 지었다”라고 한 말은 요즘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왠지 요즘따라 지난 시절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만화가 마냥 그립기만 하다. 고바우 영감의 한 올 뿐인 머리가 늘 곧게 서 있는 만화라면 금상첨화겠다. 그 시절 만화 속 고바우 영감은 화가 나거나 불의를 보면 그의 한 올 뿐인 머리카락이 꼭 굽어지곤 했잖은가. 감정을 얼굴 표정으로 표현 안하고 머리카락 한 올로 나타낸 고바우 영감 아니던가.
  이즈막 언론에서 다루는 정치판 이야기를 고바우 영감이 듣는다면 그의 머리카락은 과연 어떻게 반응 할까? 엉뚱한 상상마저 해본다. 눈만 뜨면 언론을 도배 하는 정치판 이야기 속엔 영양가라곤 전혀 없는 내용들이 다수여서다. 국민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들겠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귀 기울여도 전혀 들리지 않잖은가.
  지난 2000년 9월이다. 신문지상에서 수 십 년 동안 만났던 고바우 영감은 이제 영영 우리 곁을 떠났다. 김성환 화백이 더 이상 고바우 영감 만화를 연재 안하게 된 것이다. 이에 필자는 오늘날 다시금 고바우 영감이라도 소환해 오고 싶은 심정 간절하다. 제발 지금이라도 고바우 영감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가려운 곳을 한바탕 시원스레 긁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