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는 모두 죽게 되며, 사물(무생물)도 마찬가지로 사용하다가 망가지거나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소멸)되게 마련이다.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는 이같이 죽지 않는 것(불멸)은 없다. 빛의 분산, 소리의 울림 역시 찰나에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 찰나가 영원과는 반드시 별개의 것이기만 할까. 찰나의 빛과 소리는 파동과 파동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에테르(파동을 채우는 물질)를 동반한다. 찰나가 스쳐 지나가도 그 찰나의 감각과 현상은 남는다. 에테르는 이같이 찰나와 영원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유이치도, 호시노도, 츠다도, 수많은 릴리슈슈의 팬들도, 릴리슈슈와 에테르를 사랑하면서 같은 느낌들을 공유했을 것이다. 음악이 채우는 우리 몸의 진동도 다른 세상(영원)을 느껴 보게 해준다. 이는 에테르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에테르의 라틴어 어원이 ‘영원(aeterna)’이라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죽게 될 사람들은 영원을 동경하며 살아간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고 싶지 않고 싶은 마음 탓이다. 게다가 삶과 죽음은 정신계와는 은밀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계된다. 죽어도 죽지 않는 정신의 영역은 불가시적이지만 죽음(소멸)을 넘어선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점이 모여서 선이 되듯이 찰나가 모여 영원이 되므로 순간(찰나)이 곧 영원이고, 영원이 곧 순간이라는 비약적인 생각도 해본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어떻게 가지고 보내느냐가 문제다. 근년 들어서는 그런 생각을 부쩍 했던 것 같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깊이 그러안아야겠다는 자기 성찰이 그것이다. “밤새 눈 내려 모든 길이 지워졌다//마치 오늘이 첫날이듯이/그보다 마지막 날이듯이//희디희게 지워진 길을 더듬어 나서며//난생의 첫발을 내딛듯이/마지막 발을 제겨딛듯이//이 찰나를 끌어안아 영원을 품듯이”(자작시 ‘영원을 품듯이’) 이 짧은 시는 눈이 내려서 모든 길이 하얗게 지워진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에 길을 내면서 첫발을 내딛듯이, 마지막 발을 제겨딛듯이 걷고 마치 첫날이듯이, 마지막 날이듯이 가야겠다는 각오를 내비친 경우다. “이 찰나를 끌어안아 영원을 품듯이”라는 마지막 대목은 그러고 싶은 소망을 극대화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연장선상에서 쓴 시가 ‘꽃 한 송이’이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절정’이며, 이 생명의 절정은 순수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마음 비워서 차오르는 자리’에 피어날 수 있고, 그 찰나는 영원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담아본 것이다. 찰나와 영원을 아우르려는 꿈을 그린 이 시에서의 꽃은 소망하는 바의 ‘정신의 꽃’이기도 하다.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저 생명의 절정인 꽃,//비워서 차오르는 저 절정의 찰나를//처음이듯, 마지막이듯//깊이, 더 깊이 끌어당겨 그러안는다//이 찰나가 영원이듯,//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절정의 꽃 한 송이//마음 내려놓은 자리에 그 꽃이 핀다”(자작시 ‘꽃 한 송이’) 조창환 시인은 “이 시에서는 비움과 갖춤을 함께 지닌 영성적 정신의 깊이가 느껴지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미학적 관찰의 섬세함이 느껴진다”라며, “시인이 바라보는 꽃 한 송이는 생명의 절정이면서 그 절정의 찰나를 영원으로 승화시키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환희”라고 풀이했다. 더구나 “그 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탐욕과 이기심과 물신주의에 물든 어지러운 속세의 감정으로는 제대로 감상하고 음미할 수가 없다”고 추키기도 했다.
사실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라는 구절은 그런 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찰나가 영원이듯/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 절정의 꽃 한 송이는 찰나에 영원이 담겨있고 영원이 찰나에 스며있는 상태, 비움으로 꽃 피워진 그득한 충만의 상태, 생명의 절정이면서 아름다움의 절정인 상태”라는 점을 이 시에서 표현하려 했다. 진정 그런 꽃 한 송이를 피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