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번지에 올라 보면 고려 말의 명장 최영장군(1316~1388)의 묘가 있다. 최영장군하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이 말은 최영이 16세 때 그의 아버지 최원직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으로 지금까지도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 말 공민왕 때 1359년과 1361년에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1376년 우왕 때는 60세의 노장으로 충남 부여에서 왜구를 무찌른 무적의 장수다. 이리하여 그는 나랏일을 총괄하는 문하시중에 오르고 그의 딸은 우왕의 비(妃)가 되어 권력의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던 중 중국의 명나라가 철령(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의 이북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1388년 최영은 팔도 도통사가 되고 이성계와 조민수를 좌우 도통사로 지명하여 요동을 징벌하러 가는데 이성계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인즉,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동원이 어렵다, 셋째, 요동과 전쟁하는 중 왜군이 창궐할 것이다. 넷째, 무더운 우기에는 활의 아교가 녹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4불가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문하시중인 최영과 우왕은 강력하게 밀어붙여 요동 정벌을 실행에 옮긴다.    이성계는 4불가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민수와 상의한 뒤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이성계 일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성계는 최영장군을 고봉현(高峯縣)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해 강화도로 보냈는데 이때 최영장군 ‘왈(曰)’ 내 평생에 단 하루라도 내 자신을 위해 탐욕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풀이 날것이다. 란 유언을 남겼다.   최영은 이성계 일당에게 처형당한 후 아버지 최원직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중턱 지금의 묘 자리에 묻혔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하였다. 장군의 묘소에는 그의 유언처럼 580년 동안이나 풀이 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묘를 정비하고 잔디가 심어져있다.    중종 25년(1530)에 편찬한 『신승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영의 묘가 대자산에 있는데 142년이 지난 지금도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至今 塚上不生草)하고 이를 붉은 무덤(赤墳)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묘소의 주산은 대자산(210m)이며 한북정맥 호남산(423m)에서 갈라져 나온 용맥이 앵무봉(621m)과 우암산(328.6m)을 거쳐 내려온 용맥이다.    대자산에서 현무봉까지 많은 변화를 하면서 탈살을 했으나 완전히 순화되지는 못했고 현무봉에서 입수도두까지도 아직 살기가 남아 있지만 혈장에 와서는 험한 기운을 다 털어버렸다. 이곳은 산들이 가까이 있어 외부 산이 잘 보이지 않아 전체적으로 용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이를 은산반룡형(隱山蟠龍形)이라 부른다.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고 용․호가 잘 관쇄되어 안온한 장풍국(藏風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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