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 2-1번지에 가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의 묘소가 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 32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초창기에는 북쪽 함경도 지역으로 배정받아 생활하면서 무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47세에 영의정인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으로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 한산도 대첩, 당항포해전 등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었으나 원균과의 갈등으로 인해 억울하게 탄핵을 당한다. 
 
그런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고 권율 장군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크게 패하면서 전사를 하게 되자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을 했다. 
 
1597년 이순신은 남아있는 배와 전략 물품을 수습하여 붕괴된 수군을 재건하였고 그해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명랑대첩에서 승리를 이끈 후 다음 해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도 500여 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등 대승을 거두었으나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 왜군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시 이순신 왈(曰), “싸움이 지금 당장 급하니 조심하고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말라”는 말을 남기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사후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충무공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 후 처음에는 음봉면 산정리 금성산 중턱에 안장하였고 이 장소는 명나라장수 이여송의 풍수 참모로 우리나라에 온 두사충이 점지한 자리라고 한다. 그런 후 16년 뒤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해왔으며 이 묘소에는 부인 상주방씨와의 합장묘로 주변에 호석을 두른 봉분과 화려하지 않는 석물을 볼 때 이순신의 품격에 맞게 조성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금북정맥에서 서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국사봉(222.8m)을 일으키고 여기서 계속 뻗어 안산(200m)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행룡하다 본 혈장의 현무봉인 어라산(123.6m)를 일으켰다. 어라산 아래에 묘역을 조성했는데 현무봉에서 혈장까지는 지현굴곡이나 과협이 없고 용맥도 넓게 퍼져있어 혈장에 생기가 응결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혈장 좌우의 청룡·백호도 낮은 편이라 장풍국(藏風局)이 되어주지 못하고 특히 양쪽 어깨 부분이 낮아 바람의 피해가 예상되는 곳이다. 풍수에서는 혈장의 양쪽 어깨가 낮아 바람에 노출되면 재산피해와 더불어 절손의 위험이 있다고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