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인 권응수 장군(1546~1608)은 본관이 안동으로 1546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서 태어났다. 1584년 39세로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여러 곳에서 크게 전공을 세워 중임을 두루 맡은 뒤 선무공신 2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고, 오위도총관 겸 공조판서에 이르렀다가 63세로 생을 마치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임란 중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모집해 영천 성을 탈환하였으니 남공철이 지은 ⌜영천복성비명⌟에 이르기를 바다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육지에는 권응수 장군이 있어 그 공적을 감당할 자 없도다. 라고 하였다.    실제 영천 성 탈환전투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성곽을 공격해 점령한 최초의 전투로 일부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이 전투를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응수 장군을 포함한 영천복성 공신들은 업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재조명이 필요한 실정이다. 그는 경전과 사서에 널리 능통하였고 궁마도 겸하여 문무를 동시에 겸비한 장수였다.    선조 17년(1584)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창의하여 1592년 5월부터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하여 의병 대장이 되었다.   그 당시 영남좌도가 보존된 것은 권응수 장군의 성과였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는 정사를 귀수 위에다 짓고 생도들을 교육하였으며 산수와 문적을 즐겼는데 임금께서 이 사실을 듣고 “무공을 세우고 학문의 가르침을 밝혔다.” 하면서 『심경』과 『좌전』『 대학』,『소학』 등을 하사했다.    권응수 장군의 묘소는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 있으며 영천 신령의 경덕사에 제향 되어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현재 『 백운재실기(白雲齋實紀)』가 남아있다.    한편 ‘선무공신녹권(宣武功臣錄券)’, ‘태평회맹도병풍(太平會盟圖屛風)’, 장군의 영정, 장검, 유지(有旨) 및 장군간찰(將軍簡札), 교지(敎旨), 유서(諭書) 등 권응수 장군 유물은 1980년 8월 23일 보물 제668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 있는 장군의 묘소는 대구시 팔공산(1,192m)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묘소 뒤 현무봉을 만들었다. 현무봉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내려온 용맥은 좌․우측 계곡물을 만나면서 그 행로를 멈추었다. 주산에서 묘소까지 지현굴곡을 하며 한참 동안 내려온 중출맥은 혈장 뒤편에서 길다란 과협을 하고 비룡입수를 하였다.    혈장에는 전순(氈脣)석을 비롯한 몇 가지 혈증이 있으나 묘소와 전순의 거리감이 있어 필자의 식견으로는 약 5-6m 앞(밑)쪽으로 더 내려온 곳이 정혈처로 보인다. 그러면 뒤편이 낮아 장자절손지지(長子絶孫之地)라는 오점도 없었을 것이다. 좌향은 해좌사향의 동남향이고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며 묘소 아래의 저수지는 혈장의 생기를 잘 가두어 준다. 그리고 좌우의 청룡·백호는 본신 용맥으로 묘소를 감싸주고 있으나 좌측 청룡 어깨 쪽이 낮아 완전한 장풍국(藏風局)은 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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