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鍠, 湟)공은 신라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탄생한 3남 1녀 중 둘째 왕자로 전해 온다. 경순왕은 935년 당시 국세(國勢)가 고약(孤弱)하여 나라를 유지할 수 없었다. 백성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끝까지 국방을 위한 혈전을 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무고한 백성의 간뇌(肝腦)로 도지(塗地)할 뿐 승산이 없음을 판단하고 백성의 고귀한 생령을 지키기 위해 양국(讓國)을 위한 중신회의를 가졌다.    이때 태자 일(鎰)공은 “나라의 존망(存亡)은 필유천명(必有天命)인데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收合)하고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의존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천년(千年)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이 옳겠습니까?(三國遺事:國之存亡必有天命當與忠臣義士收合民心以死自守力盡而後宜己豈以一千年社稷輕以與人乎)” 하고 반대하였다. 백성을 살리는 길은 고려에 손국(遜國)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갖추어 왕건에게 보냈다.    그래서 태자는 금강산으로 떠났고, 둘째 왕자 황공은 처자를 버리고 부왕의 어진(御眞)을 모작(摹作)하여 가야산 해인사에 입사해서 봉수(奉守)하였다. 그 어진은 해인사의 화재로 인하여 영천 은해사 상용봉에 있는 충효암에 이봉(移奉)하게 되었는데 그 후 어진은 다시 경주 황남전(현,숭혜전) 감실에 이봉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一諱湟王讓國時棄妻子入伽倻山奉守海印寺因寺失火奉守永川銀海寺上聳峯忠孝菴後移奉皇南殿). 근년에 경순왕 진영의 보관 조건이 좋지 못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탁하였다.   신라 왕의 어진이 전해 오는 것은 오직 경순왕 어진뿐이며 이것은 오로지 황공의 효의(孝義)에 의한 것이다. 황실에서 만복을 누리며 행복한 왕위를 세습하지 못하고 졸지에 왕가가 해체되고 말았으니 그 망국의 한을 어찌 필설(筆舌)로 다할 수 있으랴. 화엄에 입문하여 범공선사(梵空禪師)가 되어 부왕의 어진 앞에 목탁을 두들기며 부왕의 여생을 걱정했던 공의 효의는 어진과 더불어 만고에 빛날 것이다.   어진은 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다른 용어로는 진영(眞影), 성용(聖容), 영자(影子), 어용(御容), 영정(影幀) 등이 사용된다. 어진은 보은 사상에 근거하여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왕을 추모하는 정례에 의하여 엄숙한 절차에 따라 제작되었다고 하며,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로 구분된다고 한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해 있을 용안을 직접 보면서 그린 것이고, 추사는 왕이 훙(薨)한 뒤에 왕의 용안을 그린 것이며, 모사는 이미 존재하는 어진이 훼손되었을 때 혹은 새로운 진전에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기존의 어진을 본으로 하여 신본을 그린 것이다.   황공이 당시 해인사에 봉수한 어진은 도사한 것이다. 그 후 1794년에 경주시 황남동에 황남전이 중건될 때는 왕명에 의해 이명기가 도사한 어진을 모사한 것이다. 현재 숭혜전 감실에 봉안된 어진은 1904년에 승려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의 작품을 보고 그린 모사작이다.   2019년에 범공선사연구회장 김근학(金根學) 이사장 주관으로 모사한 경순왕어진을 해인사 벽산 원각 방장스님의 배려로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신라 종언 이후 천여 년 만에 환귀본처(還歸本處)할 수 있었다. 그 봉안식에는 전국에서 참석한 연구회 회원과 숭혜전 증경(曾經) 참봉과 시(時)참봉을 비롯하여 범공대선사의 후손인 나주김씨(羅州金氏) 성손 등 1000여 명이 대거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백성의 목숨을 왕권보다 중하게 여긴 경순왕의 애민사상을 진영 앞에 사배(四拜) 올리며 ‘경천무운(敬天撫運) 왈(曰) 경(敬)이요 응시솔덕(應時率德) 왈(曰) 순(順)이라’ 즉, ‘하늘을 공경하고 운명을 위무함이 정중하였으며, 때에 순응하여 덕을 본받음이 순리라’는 ‘경순(敬順)’ 시호(諡號)를 마음 깊이 새겼다고 한다.   지난 6월 29일에 범공대선사 열반처인 해인사 법수사 구지(舊址) 삼층석탑 앞에서 추념식이 봉행되었다. 이날 역시 전국에서 모인 나주김씨 성손과 연구회 회원, 해인사 스님 및 숭혜전 전•현직 참봉 다수 인이 참예하였다. 청명한 날씨에 하늘에는 흰 구름이 공배회(空徘徊)하고, 사방의 산야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범공대선사의 음덕을 느끼게 하였다. 해인사성보박물관에 봉안된 경순왕진영에 사배 올리고 나니 선왕의 자애로운 눈빛이 광명의 서광처럼 마음을 밝혀 주는 듯 하였다. 먼 거리를 힘들게 왔으나 귀로에 서로 나눈 소담 속에는 보고 듣고 참가하는 행동이 진아(眞我)를 위한 자성의 방안이라 생각되었다. 이 모두는 범공대선사가 비록 화엄에 들어 속계를 떠났지만 육신을 물려준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의(孝義)의 법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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