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지난 6월에는 안동 이육사문학관에 다녀왔다. 육사의 본명은 원록(源錄),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대표적 민족 시인이다. 육사는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월 16일 마흔에 타계했다.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이육사는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에는 펜을 든 항일 투사였다. 그는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열 일곱 차례 옥고를 치루었다. 그리고도 수감 번호인 ‘二六四’ 를 필명으로 한 걸 보면, 일제에 대한 저항과 각오를 알 수 있다.   그는 1943년 어머니와 맏형의 일주기로 북경에서 서울 동대문 자택에 와서 감시하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체포되어 갈 때 부인은 세 살박이 외동딸을 안고 갔다. 이제 할머니가 된 ‘옥비’ 여사는 아직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용수를 쓴 채 그가 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버지 다녀오마’ 라는데 그 담담함에 절로 숙연해진다.   딸에게 시인이 지어준 이름은 ‘옥비沃非’로 ‘비옥하지 말라’는 뜻이다. 필자의 딸은 영화롭게 살라고 ‘비단’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육사도 딸이 부귀를 누리며 살기 바라는 마음은 같았으리라.   다만 시대가 그러하니 대한의 정신을 간직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옥비 여사는 생활고에 암까지 겪어서 주위에서 이름을 바꾸라고 했단다. 그러나 그녀는 ‘시인이 내게 주신 건 이름밖에 없는데’ 하며 바꾸지 않았다. 그녀의 선친에 대한 기억으로는 아이보리색 양복 모습이 남아있다고 했다. ‘모던 보이’였나 보다.   ‘별’의 시인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스물 일곱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생전에 시인으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가 남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육필로 세 부 필사하여 지도교수 이양하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친구 정병욱에게 주고, 한 부는 자신이 가졌다.   ‘서시’ 는 시집의 서문이다. 당시는 일제의 한글 금지 정책 시절이라 지도교수의 만류로 출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아들의 당부로 필사본을 항아리에 숨기게 되었고 윤동주가 죽자 그 시집은 유일하게 남게 된다. 친구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되어 시집을 출간하고 윤동주를 알린다. 그 집은 지금 광양 ‘정병욱 가옥’이 되었다.   윤동주는 조선어로만 시를 쓰고, 일본에 유학가기 위해 창씨개명한 ‘히라누마 도주’란 이름은 쓰지 않았다. 용정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오로지 ‘시인윤동주지묘’로 적혀 있다. 죽고 나서야 그토록 원했던 시인이 된 것이다.   예전에 가수 윤형주를 만났는데 그와 동주는 육촌간이며 영화 ‘동주’에 강하늘이 동주 역을 했고 ‘세시봉’ 에서는 자신의 역을 연기해서 인연이 깊다고 했다. 영화에는 동주가 가장 존경한 정지용 시인으로 문성근이 특별출연하는데, 선친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는 친구 사이였다.   일제 암울한 시기에 대표적 문인이던 이광수와 최남선이 ‘젊은이여 영광스런 황군이 되자’며 변절할 때 두 저항 시인이 없었다면, 그 시대는 얼마나 헛헛했을 것인가? 얼마나 암담했을 것인가? 육사가 있어 우리 민족은 의연했고, 동주가 있어 그 시대의 별조차 아름다웠다. 육사가 감옥에서 죽자, 동지인 고 이병희 여사가 시신을 수습하러 가니 유서 대신 남겨 놓은 시 ‘광야’가 있었다고 한다.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해 주사를 맞고 이름없이 사라졌다. 지금 형무소 터에는 그의 추도회에 일본인들이 찾아와 ‘서시’를 한국어로 낭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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