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공중목욕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대원들이 즉각 현장에 출동해 보니 남탕에서 자욱한 연기와 불길이 솟아올라 여탕으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남탕에서 목욕 중이던 남자들은 수건으로 대충 아랫도리를 가리고 허겁지겁 피신해 당장 인명피해는 없는 듯 보였다. 문제는 여탕이었다. 신고를 받고 화급하게 출동하다 보니 여성 대원이 동행하지 못해 여탕으로 뛰어들어가 구조활동을 벌이기에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소방대장은 안절부절하다가 소방차 안에 있던 메가폰을 들고 나왔다. 먼저 싸이렌을 울린 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메가폰에 대고 소리 질렀다.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여탕(女湯)은 들으시오……”소방대원들의 입장이 이해된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탕으로 곧바로 뛰어들 수 없는 남성 소방대원들은 그 상황에서도 제3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여탕에 있었던 여성 손님들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남성 소방대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메가폰을 들고 피난 수칙을 고지하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여당인 국민의힘의 전당대회가 끝났다. 예상대로 한동훈 대표가 압승을 거두고 절대적인 열세에 몰린 여당의 운명을 짊어지는 정치적 시험대에 올라섰다. 62.8%라는 지지율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은근히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저지해 결선투표로 몰고가 역전을 해보겠다는 작전을 펼쳤던 원희룡, 나경원 후보는 전당대회 전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어대한(어처피 대표는 한동훈)’을 거스르지는 못했다.새 대표로 등극은 했지만 한동훈 대표에게는 엄청난 숙제가 남겨졌다. 대표 개인에게 던져진 숙제만 아니라 여당인 국민의힘이 공동으로 풀어야할 난제들이다. 전당대회는 축제 분위기에서 치러져 소위 컨벤션 효과를 최대한 누려 지지율을 끌어올려야 했음에도 계파간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면서 사실상 ‘분당대회’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자폭테러 수준의 발언이 난무했고 음해와 비방이 도를 넘었었다. 한동훈에게 씌어졌던 ‘배신자’ 프레임과 ‘김건희 여사의 사과문자 무시’ 논란, 그리고 ‘댓글팀’ 운영, ‘패스트트책 공소 취소 청탁’ 논란 등 전당대회에서 횡행했던 공방은 오로지 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무자비하게 난사됐다. 결국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전당대회는 끝났고 이 갈등은 고스란히 여당 내부에 남게 됐다.그래서 한동훈 대표는 가장 먼저 당내 화합을 이뤄야 한다. 계파간의 갈등의 골은 깊고 깊어 도대체 어느 곳부터 청진기를 들이대야 할지 난감하겠지만 숙명적으로 이 숙제를 먼저 풀고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분당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개선도 해야 한다.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의혹을 두고 불거졌던 대통령과의 갈등은 한동훈 대표가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이번 정당대회가 소위 ‘친윤’과 ‘반윤’의 대결로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돈독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가 흐트러졌을 때 여당 지지자들은 우려를 넘어 절망감까지 경험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당 대표의 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여소야대의 정치국면에서 노정된 정치적 난맥상을 극복할 수는 없다.또 하나는 거대 야당인 민주당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빠르게 정해야 한다. 정치 경륜이 짧은 한동훈 대표의 정무적 판단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과거 법무부장관 시절 민주당과 다투던 태도를 견지한다면 협치는 영원히 물 건너간다. 당장 25일 본회의에서는 방송4법, 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의 무더기 통과가 시도될 가능성이 크고, 26일에는 법제사법위원회의 2차 탄핵 청문회가 열린다. 그리고 거대 야권은 ‘채상병 특검법’ 재의결에 이어 ‘김건희 특검법’. 심지어 ‘한동훈 특검법’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한동훈 대표는 철저하게 냉정한 정치력과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누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한동훈 대표의 캐릭터도 누군가의 지원에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그래서 여권 지지자들이나 그 반대 정치성향을 가진 국민들은 여탕 앞에서 발을 구르는 소방대원들과 같은 신세다. 모두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여당 안으로 한 발자국도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메가폰을 들고 외치고 있다.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여당(與黨)은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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