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 선생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우고 묻지 않는다면 사람 될 방도가 없다(人間斯世非學問無而爲人)”라고 가르쳤다. 서양의 철학자 칸트(I.Kant)도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인간은 교육적 산물(産物)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 하였고, “사람은 오직 교육을 통하여 사람이 된다.”하였다.    모두가 인간의 미완성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것을 깨우치게 하는 중요한 교훈이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는데 인생의 즐거움을 느껴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학문을 하였고, 배움을 중요시(重要視)하는 사람은 원근을 불문하고 저명한 스승을 찾아가서 그 문하생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 큰 기쁨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이질적인 성원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태어나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며 인간답게 생활하려면 각인(各人)은 먼저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작용변인(作用變人)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격의 완성을 기하는 데 마땅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말과 행동이 바르지 못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흔히들 ‘못 배운 사람’이라고 힐책(詰責)한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갈 때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은 생활 주변에서 가르침을 주는 줄 수 있는 스승적 대상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의해서 각급학교에 입학하여 형식적인 교육(formal education)을 받지 않아도 사회에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얼마든지 비형식적(非形式的)인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바람직한 인격을 갖출 수 있다. 학문을 추구하는 마음과 태도가 중요한 것은 고금을 통해 다르지 않다.   공자는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넓게 배우고 꼼꼼히 따져 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박학(博學), 독지(篤志), 절문(切問), 근사(近思)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 하였다(博學而篤志 質問而近思 仁在其中矣). 박학은 두루두루 배우는 것이고, 독지는 뜻을 돈독함이며 절문은 참된 답을 얻기 위하여 간절하고도 꼼꼼하게 따져 묻는 것이다.    근사는 가까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인 것 같다. 넓게 배우고 뜻을 굳건히 하며 간절히 묻고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학문하는 자의 태도라 하였다. 이 태도는 고금을 통해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묻지 않고 지나치면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민이호학(敏而好學)하고 불치하문(不恥下問)하라는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무엇을 배울 때 나이, 신분, 학문의 높고 낮음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저출산 인구 소멸 현상으로 학령인구가 급감하여 지방 대학에는 외국인 학생과 성인 학생들이 입학하여 교실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필요(必要)에 따라 배움의 현장을 찾아온 것이다. 평창 사회 때는 강의실이 거의 비슷한 나이의 학습자로 구성되었기에 학습준비도에 큰 편차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요구 수준과 그 편차가 다양하여 교수자는 강의 준비에 어려움이 없지 않다.   새로운 지식이 날로 증폭하여 이미 배운 지식으로는 직장에서 만족한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어서 평생교육과 평생학습을 해야 하는 사회가 되어 이를 수용하기 위해 각 대학교에서는 적정한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용하고 있다. 교수기법도 많이 변화되어 영상자료를 많이 활용하고 있어서, 시청각적 이해를 통해 학습의 효율화를 도모하고 있지만, 질의와 토의는 학습자가 갖추어야 중요한 학습방법이다.   친자(親子)의 연령 대 교수에게 질문하는 것에 수치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학습자의 구학의지(求學意志)에 맞지 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공자도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배우는 자가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닌가. 길을 잃은 자가 길을 묻지 않으면(迷者不問路) 바른길을 찾을 수 없다. 발문(發問)과 질문(質問)은 교수∙학습 장면에서의 필요조건이다.   인생의 바른길을 가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한 것이며,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모르는 것은 물어서 가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구학자(求學者)의 길은 불치하문에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지 않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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