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박철언이 아닌 시인 박철언미리 고백한다. 나는 박철언 시인과 안다면 조금 아는 사이다. 올봄 시 합평회에서 대여섯 번 얼굴을 뵈었다. 7월에 나온 여섯 번째 시집에는 합평회 때 본 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았다. 귓등으로 흘려들은 시도 있었고 마음에 꽂힌 시도 있었다. 두어 번 뵐 때까지는 유명 정치인이 옛 영광을 잊지 못해 시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건 아닌가 생각했더랬다. 계속 시를 읽으며 내가 선입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과드린다. 이 글의 주인공은 정치인 박철언이 아닌 시인 박철언이다. 시집 준비하시는 것도 모르다가 3주 전쯤 우연히 한 시인이 보내준 <라 콤파르시타>란 시를 읽었다. 이 글은 그 시를 따라가며 일렁이는 내 마음의 파랑을 새긴 기록이다. 박철언의 시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리듬이자 그리움의 언어적 지문이다.라 콤파르시타(La comparcita)장맛비가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사정없이 부는 바람/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도 반쯤 넘어졌다/일어났다 또 살짝 넘어지려다 바람에 안긴다 (...)La comparcita는 바람과 나무를 마구 휘젓고/이들이 견딜 수 없는 사랑에 취하면/음악이 된 장맛비는 바람과 나무를 냉정하게 갈라놓는다/나무는 몸을 바로 세우고 바람을 비킨다/바람은 고통의 소리를 토하면서 물러난다멜로디가 바뀌면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떨어졌다 당겼다 밀었다 현란한 동작을 뿌린다/장맛비 소리는 바람과 나무의 동작을 조였다 풀었다 한다 (...)‘라 콤파르시타’는 1916년 우루과이 음악가 마토스 로드리게스가 작곡한 탱고곡 제목이다. 장맛비가 몸을 못 가눌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 나무들은 “일어났다가 또 살짝 넘어지려다 안”기곤 한다. 시인은 라 콤파르시타에 맞춰 탱고를 추는 남녀를 나무가 바람을 안는 모습에 비유한다. 이 모습은 남녀가 춤출 때의 모습이면서 사랑할 때의 모습이기도 하다.견딜 수 없는 사랑의 리듬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람을 안는다”는 시집 제목이다. 흔히 바람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을 상징하곤 한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고 또 자유로이 사랑하고픈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 시에서 바람은 나무가 그리워하는 대상이라면 나무는 바람을 기다리는 존재다. 바람을 안지 않으면 나무는 쓰러질 수 없다. 춤출 수도 당겼다 밀 수도 없다. 바람과 나무, 그리움과 기다림이 만나는 찰나야말로 “우리의 삶” 자체다. 일어났다 넘어지고 떨어졌다 당기는, 당겼다 밀어내고 조였다 풀어내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리듬이다. 그렇다 사랑은 밀고 당기는 몸의 리듬이자 출렁이는 마음의 흐름이다. “그립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라”이미 눈치챘겠지만, 시집에서 사랑만큼 많이 나오는 감정표현이 있다. 바로 그리움이다.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그립다는 말/함부로 하지 마라”(<민들레꽃2>)라고 말한다. “다시 가슴에 돌아와 박히면/허공의 메아리로 노랗게 피어나”기 때문. 그만큼 사랑도 깊고 그리움도 깊이 가슴에 파묻혀 있다. 그리움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뜻한다. 사랑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간절히 그리는 행위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역사의 파고를 힘겹게 넘어온 나 그리고 당신(또는 당신과 내가 함께한 시공간).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유독 절절하다.사랑이 능동행위로서의 동사라면 그리움은 수동행위로서의 형용사에 가깝다. 또 그리움은 사랑과 달리 반드시 시차/거리를 전제로 한다. 나와 당신이 떨어진 만큼 그리움은 커진다. 그리고 커진 그리움만큼 내 마음은 아쉬움과 회한으로 가득 찬다. 어떤 거리인지에 따라 그리움은 두 가지로 나뉜다.하나는 공간적 거리에서 생겨나는 그리움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픈 마음이다. 즉 사랑의 시작을 위한 ‘예열 감정’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적 거리에서 생겨나는 그리움이다. 지나간 사랑을 잊지 못해 현재에 재현하고픈 마음이다. 사랑의 끝을 유예하기 위한 ‘여운 감정’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주로 노래하는 것은 추억을 동반하는 여운 감정이다. 바람의 언덕에서별이 빛나는 밤이면/당신의 모습이 바람처럼/내 가슴에 안겨들어요//그리움이 사무칠 때면/당신의 한 조각이 바람의 시(詩)가 되어/나에게 불어와요//석양이 노을 지는 바람의 언덕에서/뜨거웠던 추억의/바람에 휩싸여요//바람이여 머물러 주어요 그대로/파란 불꽃을 피우고 싶어요이 시에서도 당신은 바람으로 표현된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당신은 “바람의 시”가 되어 나에게 불어온다. 별/석양/노을과 “파란 불꽃”의 이미지 대비는 사랑의 열정을 되살리고픈 크나큰 열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바람은 어디서든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뜨거웠던 추억의 바람” 속에서 “나는 나를 잃어버”(<나는 누구인가요?>)린다. 머무르지 않는 바람은 시인에게 짙은 그리움을 남기며 사라진다.끝으로 한마디.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초과하는 회한의 감정이 가끔 눈에 띈다. 그만큼 삶의 고비가 험준했던 탓이리라. 그것들을 제외하면 몇몇 시들은 시인 윤동주의 섬세하고 담백한 감성에 육박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처럼 정치인이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고 사랑과 그리움에 한껏 취하고픈 분들에게 시집 일독을 권한다.*박철언: 시인, 전 장관. 순수문학 등단(1994). 영랑문학상 대상 등 수상. 시집 《작은 등불 하나》 《오늘이 좋아 그래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