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동안 우리는 몇 번의 탈바꿈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이 말은 심신 모두의 변화를 의미한다. 세월은 사람의 면모를 변모 시킨다.    그래 주위를 둘러보면 친구나 지인을 믿었다가 전과 달라진 심성에 실망 했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또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변한 외모에 놀라기도 한다. 하긴 십년이면 강산도 달라진다는 옛말도 있잖은가. 어찌 인간으로서 항심(恒心)을 지닐 수 있으며, 변함없이 청춘을 유지할 수 있으랴. 이와 달리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말도 회자 될까. 즉 이 말은 천성 고칠 약 없다는 뜻일 게다.   가장 눈에 띄는 우리의 변화는 뭐니 뭐니 하여도 외모일성 싶다. 인체에 찾아오는 노화는 결코 세월을 비껴갈 순 없다. 아무리 늙지 않으려고 안간힘 써도 소용없다. 얼굴에 내려앉는 세월의 흔적은 성형 술로도 감쪽같이 지울 순 없다. 그야말로 얼굴 거죽을 한껏 문지르고 늘어진 살갗을 집어올린들 시시각각 얼굴 위로 덮쳐오는 시간의 그림자를 어찌 피하고 감출 수 있으랴.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44세, 60세 때 확연히 노화 징조를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사실을 필자는 일찍 깨달은 적이 있다. 지난 40 세 때 일로 기억한다. 당시 5일장이 서는 어느 시골 소읍(小邑)의 재래시장에서였다. 가을 어느 날 이곳을 찾았을 때 일이다. 시장 입구를 들어설 무렵이다. 길 건너 저만치서 머리가 훌러덩 벗겨진 어느 남성이 잠시 길 위에 서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낯이 익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곤 눈을 의심했다. 학창시절 필자가 자신의 첫사랑 여자라고 고백해 왔던 남자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어서다. 왜냐하면, 젊은 날 그 남자는 이목구비가 마치 명장이 빚은 조각처럼 잘 생겨서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를 본 후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길옆 가게 쇼 윈도우에 몸매를 이리저리 비춰봤다. 혹시 그가 나를 한 눈에 알아 채 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릿결과 옷매무새를 고치느라 분주했다.    이 때였다. 그 남자는 단숨에 길을 건너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앞에 걸음을 멈추고는 한 손에 들린 수첩을 연신 들여다보며, “ 저, 죄송하지만 여기 면사무소가 어딘지 아세요?” 라고 묻는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필자를 못 알아보는 눈치다. 이런 그 앞에 선뜻 먼저 아는 체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 네 저기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시면 그 끝에 있어요.” 라고 일러줬다.   그러자 그 남자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습니다.” 라고 짤막한 말을 남긴 채 성큼성큼 걸어서 이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등 돌려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상실감이 밀려왔다. 학창시절 끈질기게 구애를 해오던 그의 모습을 가끔 떠올리곤 하였으련만…. 그는 달랐다. 아무리 그동안 필자 외양이 판이하게 변모했다 할지라도 어찌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모습을 이토록 까맣게 잊을 수 있으랴. 그러고 보니 왠지 억울한 감정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끔 그의 모습을 가슴 속에서 꺼내보며, ‘지금쯤 그는 무엇을 할까?’ 라며 안부를 궁금해 하였잖은가.   그때 시골 장터에서 우연히 만났던 남자가 젊은 날 내게 해왔던 말이 떠올려질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있다. 김효근이 작곡한 가곡인 ‘ 첫사랑’이 그것이다. =‘설레는 내 마음에 빛을 담았네/말 못해 애타는 시간이여/나 홀로 저민다/그 눈길 마주친 순간이여/내 마음 알릴 세라 눈길 돌리네/그대와 함께한 시간이여/나 홀로 벅차다/내 영혼이여/간절히 기도해온 세상이여/ 날 위해 노래해/언제나 그대에게 내 마음 전할까/오늘도 그대만 생각하며 살다 그 마음 열리던 순간이여/떨리는 내 입술에 봄을 담았네/그토록 짧았던 시간이여 영원히 멈추라=<생략>’   위 노래는 첫사랑의 연인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가사가 전부라서 부를수록 애절하다. 돌이켜보니 지난날 그 남자가 필자에게 속삭인 말은 진정성이 없는 말이 분명했다.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나 잊지 못한 채 평생 가슴에 간직하잖은가. 한편으론 그날 그 남자가 필자를 못 알아챈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청순했던 모습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당시 펑퍼짐한 40대 중년 여인인 필자 아니었던가. 이로보아 그 때 상황은 지난날 그 남자가 필자에게 했던 말이 진실이라면 더욱 잘된 일이었다.   첫사랑 연인은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가 이를 증명한다고나 할까. 그날 장터에서 마주친 그 남자는 필자의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가을 햇살에 빛나던 그 남자의 대머리, 복어 배 마냥 툭 튀어나온 배를 바라보며 필자 역시 상대방과 비슷하게 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므로 그를 탓할 순 없다. 세월은 참으로 무심히 흘렀다. 지나가버린 그 시간 속에 푸르렀던 젊음도 속절없이 스러졌다. 이즈막 지난날 필자에게 호감을 지녔던 그 남자를 떠올리노라면 왠지 후회가 앞선다. 차라리 그 때 그곳에서 그 남자에게 내려앉은 시간의 그림자를 직접 엿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었다면 젊은 날 그가 지녔던 풋풋하고 매력적인 모습만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 아니던가. 이럴 때는 밝은 눈이 야속하기 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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