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아는 시인의 시선집을 어저께 택배로 받았다. 김부조 시인의 '우리 모두는 길치였다'(동서문화사, 2023). 며칠 전 경북신문 '아침을 여는 詩' 코너에 소개된 '어떤 안부'를 쓴 시인이다. 시 소개도 직접 한 터라 읽고 지나치려 했는데 시선집을 펼치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30여 년 시인의 길을 돌아보는 시선집에는 단단한 알곡 89편이 담겨 있다.  시선집은 나 같은 삶의 길치를 위한 지혜로운 안내서다. 길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의 길만 따라가려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은 책. 욕망으로 길을 잃은 사람들, 자기 길을 가기 두려워 주춤거리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시인은 시 길치를 위한 '김부조 시 창작 인문학 교실'도 운영 중이다. 길을 아는 척하는 길치들 엇갈린 길을 기웃거리다 길치는 / 새로운 길에 눈을 뜬다 / 어둠을 몰래 앓고 난 새벽처럼 / 막다른 골목에서도 / 어두운 벽 너머로 이어지는 / 밝은 지름길을 기웃거리다 / 새로운 길에 눈을 뜬다  애초에 길은 없었다 / 누군가가 첫발자국을 남기면 / 그 뒤를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 운명처럼 답습했을 때 / 그것이 바로 길이 되었듯이 / 엇길에서도 서로 즐겁기만 했던 / 이제 막 새로운 길에 눈을 뜬, / 미안하지만 낯 뜨거운 / 우리 모두는 길치였다 -김부조, '우리 모두는 길치였다'  처음엔 '우리 모두는 길치이므로 부끄러워 말고 새로운 길을 가자'로 읽었다. 다시 읽으니 길치임에도 길을 잘 안다고 우기고 뻐기는 '낯 뜨거운' 내 모습이 보였다. 뜨끔했고 부끄러웠다. 제대로 읽지도 않고 멋대로 해석한 나야말로 시 길치인 셈이다. (시인은 '발표한 시는 이미 저의 것이 아니므로' 각자 받아들이며 된다고 말해주셨다.)  위 시에서 길치는 남의 길을 답습하면서도 새로운 길을 간다는 자만에 빠진 사람들이다. 답습은 개척 아닌 추종, 창조 아닌 흉내다. 답습을 통해 찾은 새로운 길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롭다고 착각하며 남이 낸 길을 편하게 따라갈 뿐이다. 길치는 길을 헤매면서도 다 안다며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득도와 해탈의 가면무도회 도봉산 입구 / 안내센터 앞, (…)// 비우면 이내 차오를/ 욕망의 공간,/ 그럼에도/ 득도에 목마른 구도자들이/ 백팔번뇌를 뱉어내며, / 위장된 일일 해탈의/ 가면무도회를 즐기고 있다 -'가면무도회' 중 왜 낯 뜨거운 길치로 살아갈까? 삶에는 엇길도 지름길도 있을 리 없다. 미리 정해진 길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도 없다. 그럼에도 쉽고 빠르게 길을 찾고 목표에 도달하길 욕망한다. 동시에 길치가 아닌 척 다 아는 척 우쭐대기 바쁘다. 나도 그렇다. 욕망이 해탈로, 위선이 득도로 위장하는 '가면무도회'. 해탈의 가면을 쓴 이 세상에는 '마음을 비운 듯한', '마음을 비워 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다행이다 // 내가, 그곳에 있었으니'라고 말한다. 가면무도회를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란 뜻일까. 아니면 나도 욕망하는 인간임을 깨달을 수 있어 다행이란 뜻일까. 어느 쪽이든 시인은 가면 쓴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윤리적 염결성은 30여 년 동안 한 번의 불화 없이 시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욕망은 움켜쥐는 직선의 행위다. 두 마리 개미가 먹이를 다투는 행위와도 같다. 허무하게도 '휙 / 흙바람과 함께 / 사라지는 그들과 먹이'('가혹한 질서'). 시인은 직선이 아닌 '곡선도 선이라는, / 굽은 나무의 속울음' 에 귀 빌려주려 한다. 곡선은 휘어짐이나 무너짐이 아니다. '맑은 빈손', '맑은 가난'('움커쥔다는 것')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것. 불화가 넘치는 사랑이고 상처가 삶의 선물이라는 모순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것. 자기 욕망을 깎아 시로 빚는 시인 깃털 하나 / 남기지 않는다 / 빛바랜 얼룩 한 점 / 남기지 않는다 / 가야 할 때에 맞추어 / 뒤돌아보지 않으며, / 새들이 날아간 하늘은 / 깨끗하다 -'새들이 날아간 하늘은 깨끗하다' 욕심 한 점 남기지 않으려는 정갈하고 단호한 의지가 전해진다. 나는 깨달은 듯 달관의 포즈를 보여주는 사람도 시도 좋아하지 않는다. 멋들어진 포즈 뒤에 숨어 타인의 물질을 탐하고 감정을 착취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차라리 욕심을 드러내는 솔직함을 좋아한다.)  시인의 시는 다르다. 시인은 자기 욕망을 깎아 시로 빚는 지난한 시간을 감내해왔다. 그의 깨달음이 깎여나간 욕망의 흔적이라면, 그의 달관은 헛된 욕망과의 사투의 산물이다. 시인은 '깃털 하나', '얼룩 한 점' 남기지 않는 깨끗한 삶, 새들이 날아간 하늘처럼 투명한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다.   시인에게 바람이 묻는다. 어떤 날을 위해 시린 발로 걷느냐고. '그날을 위해'('그날을 위해서라고')라는 시인의 말. 그날이 어떤 날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시 쓰는 매일매일이 그날이 되길 바란다. '차가운 마침표' 말고 '낯선 물음표', '따스한 느낌표'('문장 부호에 대하여')와 함께하는 날들이기를. 타인이라는 미로에서 길 잃은…. 끝으로 이 글을 쓰며 끄적인 졸시를 부끄럽지만 내려놓는다. 길치 뜻을 시인과 다르게 풀어보았다. 나처럼 타인이라는 미로에서 길 잃고 헤매는 이들에게 바친다.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 내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 타인이라는 미로를 헤매고 / 타인의 마음만 헤아리며 / 세상을 한탄하고 나를 저주했다나는 길을 간 적이 없다 / 틀린 길일까 봐 / 돌아오지 못할까 봐 / 한자리에서 맴돌았을 뿐 / 타인의 마음에 주파수 맞추고 / 길 너머 세상을 동경했을 뿐이제 조금은 알겠다 / 내 앞의 길이 세상 전부임을 / 아니 나 자신이 바로 길임을 / 길 모르는 길치여도 괜찮다 / 철모르는 철부지도 괜찮다 / 세상을 향해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라 -'나는 길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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