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水素)가 산소(酸素)로 바뀌거나 산소가 질소(窒素)로 바뀌는 일은 통상적인 자연계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흔히 우리는 '저 사람이 왜 저래? 사람이 변했군.' 이라고들 말하지만, 사람의 인성(人性) 또한 원소(元素)의 고유한 성질처럼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그러니까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과 성향을 들어내는 사람들은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잘 감추고 있었지만 결국에 본 모습을 들어 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한다.우리가 미물(微物)이라고 생각하는 곤충이나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생존 전략상 교묘한 위장술을 진화 발전시킨 생명체들은 많다. 마찬가지로 생명 진화의 정점(頂點)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 역시 위장술에 대단히 능하여, 어떤 사람의 본 모습을 알기가 참으로 어렵고, 심지어 타인이 아닌 자신의 본 모습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이 목적 항에 도착하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경위도(經緯度) 상에 아선(我船)의 위치이듯이, 사람이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른 채 백년을 구도한들 도(道)에 이를 수가 있을까? 하기에 경(經)은 말한다. 도(道)를 구하고자 만리 길을 나서기 전에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정부터 시작하라고....인간이 거울을 발명하기 전 까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겠지만, 어느 날 거울이라는 광학적 도구를 발명하자 드디어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반추해 보게 된 것인데, 특히 여성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이 때 부터였을 것 같고, 위장술의 일환인 화장술(化粧術)을 발전시킨 계기가 아닐까 한다.그러나 자신의 외모(外貌)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발명한 인간이 아직 자신의 내모(內貌)를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지지 못했으니, 도(道)를 묻는 학승(學僧)에게 조사(祖師)가 큰 소리로 답한다. '자심반조(自心返照)!'표현은 달라도 성경에도 있는 말이 아닌가?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여도 네 눈에 든 대들보를 보지 못하는구나!'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타인의 티끌 같은 허물을 탓하기에 여념이 없고, 스스로의 위치도 모르는 자가 목적지를 외치니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맨다.‘소크라테스’가 경상도 방언으로 '니 꼬라지를 알라!' 고 한 말 역시 너의 '본래면목' 부터 찾으라는 불가(佛家)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옷이라는 물건으로 몸의 치부(恥部)를 가리기 시작하면서 부터 위선(僞善)을 일상화 해온 호모사피엔스 종이 다시 입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지는 순간 더 진화된 새로운 종으로 탈피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게 우리 모습은 아닌 듯 하고 또 나의 모습도 아닌 듯하다.학승이 다시 스님에게 질문한다. '스님의 본래면목은 무엇입니까?' 스님이 학승에게 답한다. '이놈아! 본래면목은 고만두고 니 현재면목이나 보아라!'양자물리학이 물질의 기본 형상을 알고자 하지만, 알아 낸 것이라고 해야 형상을 규정할 수도 없고, 그 존재의 위치조차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다름 아닌 ‘불확정성원리’라는 것인데,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이 공(空)하다는 불(佛)사상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따라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알려면 진아(眞我)를 찾아야 할 것인데, 무아(無我)를 모른 채 진아를 찾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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