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동장군(冬將軍)이 매서웠다. 그러나 이제는 하장군(夏將軍)이 동장군보다 더욱 무섭다. 올여름 하장군이 몹시 열받았나 보다. 지상을 향해 불화살을 마구 쏘아대며 세상을 불가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사는 게 몹시 힘들고 고역이었다. 밤새도록 선풍기를 틀고 열대야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앞으로 여름이 더욱 뜨거워진다고 예견한다. 그래서 금년 여름이 가장 덜 뜨거운 여름이라고 한다. 여름이 오는 게 무섭다.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지옥 중 가장 아래층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곳 무간지옥은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죄를 지은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9월 중순에 폭염경보가 발령되었다. 지구가 단단히 병이 났나 보다. 신열로 펄펄 끓는다. 모든 사람들이 아우성이다. 무간지옥이 따로 없다. 그 병을 고칠 용한 의사는 어디 없나, 소나기뿐이다. 바람이 먼저 달려온다. 구름이 태양을 이기고. 바람이 구름을 이긴다. 더위를 말끔히 씻으며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긋지긋한 폭염 씻어갈 소나기를. 추석 준비로 시장에 갔더니 땀이 줄줄 흘러내려 눈이 따가웠다. 우리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을 무더위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원한 가을이 아닌 무더운 여름에 추석을 보냈다. 지금까지 이렇게 무더운 추석은 없었다. 올 추석이 일찍이 찾아온 것도 원인이지만, 그보다도 하장군(夏將軍)이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버티고 있어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하석(夏夕)이 되었다. ‘폭염경보가 한가위를 덮쳤다. 불가마 속 뜨거운 열기가 추석 연휴를 삼켜버렸다. 태어난 후 가장 힘든 추석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며 잠 못 드는 우리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달은 환히 웃기만 한다. 달님 달님 어서 시원한 가을 보내주시어요.’(폭염경보 권오중)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달님이 무척 미안했는지 소나기를 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하장군(夏將軍)의 꼬리가 참으로 길다. 사람들 원성이 자자해도 그렇게 욕을 먹어도 하장군(夏將軍)은 고개를 까딱하지 않는다. 이렇게 매정한 하장군(夏將軍)때문에 더우면 냇가로 달려가 더위를 식히며 물장구치고 놀던 옛날이 무척 그리워진다. 문득 옛날로 달려간다. ‘풍경이 산사에서 웁니다. 댕강댕강 바람이 그리워 웁니다. 억새가 빈들에서 웁니다. 하들하들 봄이 그리워 웁니다. 문풍지가 찬바람에 웁니다. 나붓나붓 그때가 그리워 웁니다. 그리움에 목말라 그리움을 꼬옥 껴안고 세월의 강을 거슬러 연어처럼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때로 돌아가 입이 새까맣도록 오디 따먹고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며 까만 얼굴이 되고 싶습니다. 뒷동산에 뻐꾸기소리가 앞개울에 물안개가 필릴릴리 버들피리 소리가 그곳에서 아슴아슴 피어납니다. 개울에서 송사리 쫓으며 미역감고 물장구치다 여우비 오면 비를 맞고 무지개로 피어나고 싶습니다. 밤이면 모깃불 피워놓고 할머니 옛날얘기 듣다 별을 헤고 반딧불 좇으며 설핏한 새벽달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워 그리워서 귀뚜라미처럼 웁니다. 하도 그리워 매미처럼 웁니다. 그리움이 쌓여 별이 되고 그리움에 사무쳐 꽃이 됩니다. 별은 하늘을 그리워하고 꽃은 봄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워하면 할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철썩철썩 파도가 됩니다.’(그리워 그리워서 웁니다 권오중) 호우가 퍼붓고 추분이 지나니 지옥 같은 여름 터널의 끝이 환해지며 가을이 열렸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기나긴 터널이었다. 서쪽에서 하늬바람이 분다. 서늘한 바람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하늬바람 타고 가을이 왔다. ‘반갑다 가을아. 고맙다 가을아.’ 이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9월의 끝자락. 낮에는 무척 뜨겁다. 바야흐로 지금은 뜸을 들이는 시간이다. 그래야 가을이 맛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밥이 끓다가 치이익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조용히 뜸이 들고 있다. 이제 막바지 무더위가 세상을 뜸들이고 있다. 가을이 맛있게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