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827~898)는 광양 옥룡사의 비문에 기록되기를, 전남 영암 사람으로 통일신라 후기인 흥덕왕 2년(827)에 태어나서 효공왕 2년(898)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는 15세에 출가해 월유산 화엄사에서 대경(大經)을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고 20~23세 때는 혜철 스님 밑에서 선종을 공부해 크게 깨달았으며 23세에는 천도사에서 불교 의식인 구계(具戒)를 받았다. 그는 운봉산에서 토굴 생활, 태백산 앞에서 움막생활을 하면서 수도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옥룡사(玉龍寺)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양하였다. 도선은 지리산 어느 동굴에서 백발노인을 만나 풍수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고 백성들을 포교하는 수단으로 풍수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훗날 풍수지리설의 원조이면서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가 유명세를 타게된 계기는 송악(개성)의 성주인 왕륭의 집터를 잡아주면서부터다. 어느 날 전국을 순회하던 중 개성에 도달하여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장차 삼한을 통일할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면서 왕건의 출생을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적중하자 왕건을 비롯한 그의 후예들인 고려 왕들은 도선을 국사로 추증하여 공경하였고, 만백성에게 도선국사를 자손 대대로 공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풍수는 도선이 중국 당나라 일행선사에게 전수받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도선이 중국 당나라에 다녀왔다는 자료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당시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중국 풍수를 배워왔고, 다만 도선이 중국에서 들여온 이론 풍수를 우리나라의 자생풍수와 접목시켜 집대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국은 광활한 대지로 우리나라와는 지형이 많이 달라 면적이 좁은 우리나라에서 중국 풍수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흠결이 있는 땅은 고쳐서 길지로 만들어 사용하는 비보(裨補)풍수를 많이 이용하였다. 사람이 병이 나면 침을 맞거나 뜸을 떠 치료하듯이 땅도 허한 곳은 보완하고 기운이 강한 곳은 눌러서 고쳐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국토를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듯이 고쳐 사용하는 것을 풍수에서는 비보풍수라 하고 이 방법은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도선국사는 만년에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의 옥룡사에 머물렀는데 그의 이론을 배우고자 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에 지기(地氣)를 비보하는 사찰 500여 곳을 건립했고 한국불교가 숱한 강대국의 침략전쟁에도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은 그가 전국의 사찰을 명당 터에 정해놓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해온다. 그는 898년 향년 72세로 입적하였고 효공왕은 그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의 현종은 대선사(大禪師)로, 숙종은 왕사(王師)로,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으며 의종이 선각국사비를 세워 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嶽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옥룡기(玉龍記) 등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