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튀어나왔다. 짧은 날개와 다리가 껑충해 보이지만 놀라지는 않는다. 평소에도 기분 내키는 대로 오가는 녀석이다. 밤이면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라 부담 없이 대해 왔어도 늦가을에 보는 것은 드물다. 못 다 부른 노래가 있는지 혹은 지난 가을 콘서트에 올리지 못한 레퍼토리가 있는 것일까.   창밖으로 달빛이 새어들었다. 귀뚤귀뚤 졸라대는 것 같은 소리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조각달 얼레에 감긴 선율이 은빛 오선지에 그어진다. 어딘가 악보라도 있는지, 싱그러운 음률이 쏟아지는 가운데 초대받지 않은 내가 가을맞이 연주회를 관람하고 있다. 관객도 없는 무대였으나 멋들어진 선율이 가을밤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나직한 음악을 듣다 보면 소리의 진원지가 떠오른다. 지휘는 물론 반주도 없지만 고즈넉한 선율은 장마가 걷히면서 들려 온 소리였다. 무더위도 한풀 꺾이는 팔월 말 일찍 음악에 눈을 뜬 녀석들이 초저녁부터 음을 잡는다. 쯔쯔쯔, 쯔쯔 찌찌하는 서곡에 이어 쯔이쯔이 하면서 제법 익숙한 멜로디를 엮는다. 자정까지 부르고는 저희 깐에도 쉬는 듯 한동안 잠잠하다. 다음은 여러 파트로 부르는지 2부로 나누어진 멜로디가 훨씬 숙성된 느낌이다. 호흡이나 맞추듯 시끌시끌하다가 거짓말처럼 뚝 그쳐 버린다.   다시금 소리가 들리는 것은 새벽녘이다. 어색한 음정이 섞이기도 하지만 얼마 후에는 불안정한 화음을 지적이나 받은 듯 한결 다듬어졌다. 사나흘 지나면 며칠 새 그 정도인가 싶을 만큼 투명한 음색으로 바뀐다. 물빛처럼 매끄러운 선율을 들을 때마다 음악회 한번 갈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남다른 감상에 빠지곤 했다.   깊어가는 가을밤 오동잎까지 떨어지면 감동은 훨씬 가중된다. 세상에 드문 음악회다. 한번 가려면 별도로 짬을 내야 하는데 특별한 준비가 없어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비록 소규모지만 조락의 계절에 펼쳐진다는 게 가장 큰 특혜다. 대대적인 음향 효과를 객석에서 분배받는 게 아닌 오로지 나 혼자 독차지하는 기쁨이라고나 할지.   어느 때는 개미가 드나들었다. 그 작은 몸으로 노트북 화면과 벽을 기어 다닌다. 우리가 개미를 작다고 보는 만큼 우리를 크다고 보는 개미와의 장벽도 궁금하다. 우리 큰 것만큼 개미는 실제보다 작아 보이고, 개미가 작은 만큼 우리 공연히 크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떼로 몰려들기도 했다. 내 방을 세상의 전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기어 다니는 벽을 우주의 바깥벽으로 알 테고 옷장과 책장 등의 소품을 딴에는 불가사의라고 하면서 갑론을박일 테지. 개미들이 우리 사는 세상을 불가사의라고 할 것처럼 우리에게도 수수께끼 대상은 있지 않을까. 차원이 다르고 시점이 다를 뿐 방대한 세상에 의혹을 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번은 꽃밭을 손질하다가 개미집을 건드린 적이 있다. 흙덩이가 갈라지면서 터널 같은 집이 주저앉는다. 이어서 까맣게 몰려나온 개미 떼는 아파트 단지가 무너질 때의 혼란을 보는 듯했다. 마당을 쓸면서 조심을 해도 죽는 개미가 속출한다. 혹은 개미집을 밟아 무너뜨리기도 하면서 얼결에 저지르는 실수를 헤아리곤 한다.   장마철에는 달팽이가 기웃거렸다. 후텁지근한 여름 방충망까지 열어놓으면 슬금슬금 기어오른다. 느릿느릿한 걸음이 답답하지만 느린 만큼 빨라지는 묘수를 보는 것 같다. 우리 느긋해야 될 경우는 서두르고 정작 급할 때는 미적대면서 뜻하지 않은 여파에 시달렸다. 제 몸 자체가 집인 듯 힘겹게 지고 가는 모습에서 허둥대지 않는 삶을 그려본 것이다.   진정한 빠르기는 한 발짝 물러나면서 생긴다. 빨리 가면서 모르고 지나친 것 중에 방짜가 있다. 속도에 묻혀 버린 것을 찾아내다 보면 서두르는 바람에 잊고 있던 깊이와 연륜을 알 수 있다. 느리고 빠른 자체만 따질 게 아니라 시점을 적절히 맞춰야 한다는 게 천천히 가는 달팽이 집 멘트다. 정말 작은 집이고 손바닥만한 우주지만 거기야말로 아름다움의 본령이다. 귀뚜라미가 커다란 곤충이라 대대적인 음악회를 열었을까. 작은 중에도 소리를 집약시키는 저력 때문에 진귀한 음악성을 드러냈다. 작을수록 알뜰히 보듬어야 하리. 봄이면 새싹을 밟을까 봐 외출도 삼가듯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으로 작아도 작지 않은 존재가 돋보일 테니까. 귀뚜라미는 그 새 사라졌는지 기척이 없다. 제풀에 오가는 터지만 오늘은 조금 서운했다. 밝아오는 새벽처럼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막이 내리던 여운과 음악으로 풍성해지던 가을밤의 추억이 아련해 온다. 막은 내려졌어도 또 다른 콘서트를 준비하듯 돌아올 가을을 위해 새로운 멜로디를 꿈꿔 보는 밤, 창밖에는 바람이 지나가고 나는 때늦은 새벽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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