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면은 문경시 남단에 위치해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으로는 예천군 용궁면과 접해있고 남으로는 예천군 풍양면, 상주시 사벌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특히 문경시 최대의 평야지대인 친환경 미곡생산지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특산물은 사과, 수박, 오이, 양파 등을 특화 재배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전국 최대의 표고버섯 재배단지 조성을 목표로 전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영순면은 신라 때에는 영순부곡, 또는 임하촌이라 호칭되다가 1260년경 고려 원종 때 태금취라는 장군이 임하촌 태생으로 몽고병과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워 부곡을 높여 영순현이라 불렸다. 
이후 상주에 예속됐다가 조선초기 상주목 영순면으로 호칭됐으며 고종 32년에 한때 용궁현의 서면이 됐다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궁현 서면 일부와 함창현의 동면 일부가 합병돼 지금의 영순면이 됐다.영순면은 11개 법정리와 22개 행정리, 102개 반으로 53개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2024년 11월 기준 1459세대에 2283명이 거주하고 있다. 65세 이상 인구는 1116명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마을현황과 유래를 살펴보면 먼저 영순면의 중심마을로 의곡리가 있으며 갬실·개미실, 감골, 무라이, 도연, 정골 등의 마을이 있다. 갬실·개미실은 1575년경 남원양씨의 양응해라는 사람이 이곳을 개척해 정착했다. 지형이 개미의 혈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갬실’이라 명명하게 됐고 현재는 남원양씨와 경주김씨가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감골은 김해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했을 때 가가호호에 감나무를 심었고 심지어 밭둑에도 감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감골’이라고 했으나 현재 이곳에서는 감나무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무라이는 지금으로부터 170여년전 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 할 당시에 이 마을이 영강보다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마을 전체가 물에 갇혔다가 비가 멈추면 물이 빠져나갔다 해서 ‘물안’이라 불렸다. 그후 안동권씨 초은 권병희 선생이 이곳에 이주해 다른 성씨와 모여 편안히 잘 살아 보자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퇴안’으로 개칭했다. 당시 서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안동권씨 외에 순천박씨, 상산김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생활하고 있다.
 
도연은 도지정문화재인 청산재가 있는 곳으로, 옛 마을 앞에 큰 못이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이 못이 매몰돼 없어지고 그 자리에 길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도연’이라 불렸다. 
청산재는 문광공 홍귀달의 넷째 아들인 우암 홍언충의 재사다. 후사가 없어 외손인 검간 조정이 창건한 것으로 조선 전기 외손봉사의 예를 보여주는 건축물로 문화적 의미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형태로 건축연대는 평면형식과 고식의 창호 중간에 기둥을 세워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한 영쌍창 등의 건축수법이 남아있다.
 
평면구성은 재·정·당·정사의 유형 중에서 가장 앞선 형태이며 기능상 정자 역할을 겸하고 있다. 지방 사림과 사대부 건축물의 유형 및 양식 편년 자료로서 의미가 인정돼 지난 2005년 6월 20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인 홍귀달 선생 신도비가 있는 율곡리는 밤실·율곡, 동무지·동산, 새갓, 응골·어헌곡, 딩골·전촌, 오랫골·애경당, 지장골 등의 마을이 있다. 밤실·율곡은 1470년경 성종때 대제학이었던 허백정 홍귀달선생이 시묘차 낙향해 학문을 즐기며 자연을 벗삼아 지낼 무렵에 이곳에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밤실’이라 불렸다.조선 초 문신이자 청백리였던 문광공 홍귀달(1438~1504) 선생의 신도비는 높이 3.74m, 너비 1.20m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대제학을 지낸 당대 명문장가인 남곤이 문장을 짓고 아들 홍언국이 글씨를 썼으며 사후 30년이 지난 조선 중종 30년에 세운 것이다.비각 안에 있는 비는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이 아름답다. 비문은 일부 심하게 닳아있어 읽기가 힘든 상태이나 다행히도 부림홍씨 세덕록에 그 원문이 실려 있으며 비문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2523글자다.오랫골·애경당은 조선 성종 때 문광공 홍귀달 선생이 시묘살이를 하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부모의 신위를 모시던 사당의 이름이 ‘애경당’(愛敬堂)이어서 한때는 동네 이름도 사당 명칭을 따서 ‘애경당’이라고 불렀으나 근래에 와서는 ‘오랫(래)골’이라 부르고 있다.
 
이목리에는 금성개·금포, 백포, 꽃개·하풍진 등의 마을이 있으며 지난 2013년 낙동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야구장과 40대 주차 규모의 오토캠핑장, 다목적광장 등을 조성해 최근까지도 전국에서 많은 야구동호인들이 이곳을 찾아 지역 경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낙동강을 접하고 있는 이목리 금포마을은 학문을 숭상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비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 건너 예천의 삼강나루와 마주하고 있으며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있어 ‘금포’라 불린다.25가구에 4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25가구 중 23가구가 진주 강씨로 요즘 보기 드문 집성촌이다. 집성촌인 만큼 법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우애가 깊고 인정이 좋은 마을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수박과 애호박,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금포마을은 독립유공자가 5명이나 배출된 마을로 10촌 이내 친척 중에서 5명이나 배출된 것은 한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선 격으로 이런 사례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이 마을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은 강병유(1858~1921) 지사다. 강 지사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귀향해 집안 청년들을 이끌고 문경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이강년의 부대에 합류해 촤종사로 활동했다. 이후 2020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이밖에도 강순필(독립장), 강병욱(애국장), 강내영(이하 건국포장), 강병수 등 4명의 지사가 이강년 부대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금주정사가 있다. 정5품 통덕랑을 지낸 설월당 강주식이 독서를 하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그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얼굴이 단정하고 덕행과 문장이 세상에서 추앙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권순구 면장은 “지역 문화시설이 취약해 이번에 생활문화센터 조성으로 주민들이 헬스장과 문화교실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도 파크골프장 조성 등을 계획하고 있어 시민들의 건강증진에 큰 기여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