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면은 문경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북면, 남동쪽으로는 산양면, 남서쪽으로는 통합 전의 점촌시, 북서쪽으로는 마성면과 접경하고 있다.호계면 상징인 오정산자락에 불사조 상무부대인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해 지난 2015년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지역 유일 대학인 문경대학교와 숭실대학교 문경연수원, 문경교육지원청이 위치해 있어 스포츠·관광·교육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주요 특산물은 쌍샘배, 사과, 홍시감, 느타리버섯, 청려장, 청국장, 두릅 등이 생산되고 있으며 청국된장과 쌍샘배즙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호계리에서 생산되는 쌍샘배는 당도가 높고 맛이 뛰어나 전량 해외로 수출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면 전체 면적은 53.10km²로 견탄리, 별암리, 호계리, 부곡리, 선암리, 지천리, 가도리, 구산리, 우로리, 막곡리, 봉서리 11개 법정리와 17개 행정리, 95개 반으로 구성돼 있으며 2024년 12월 기준 1430세대에 2290명이 생활하고 있다.면 소재지 사찰은 봉서리 봉천사, 별암리 오정암 등이 있으며 손꼽을 수 있는 유원지로는 영강변에 위치한 호계 숲과 낚시터로 이름난 별암 만세지가 있다.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먼저 봉서리는 1545년경 임진왜란 이전에 경주사람 이씨가 이주해 개척한 후 봉서리라 부르다가 그 후 잿봉서가 생기자 이 마을을 구봉서라 불렀다. 본래 이곳은 상주군 산서면의 지역으로 봉황새와 같은 바위가 있어 봉서라 했고 고종 32년 문경군에 편입됐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봉리, 하봉리, 반암리 일부지역을 병합해 봉서리라 하고 호계면으로 편입시켰다.
봉서리에는 월방산 자락의 병암정과 삼층석탑이 있다. 병암정은 봉서2리 마을 뒤편 월방산 중허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다. 정자 전면에는 수령 400년의 소나무와 좌우로 배롱나무가 풍치를 돋우고 있다. 좌측에는 봉천사가 자리잡고 있다.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우측 전면의 토석 담장 사이에는 일각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했다. 이후 담장과 출입문을 허물어 지금은 그 형태가 남아있지 않다. 병암정은 1칸 반 규모의 온돌방과 반 칸 정도의 마루를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뒀다.
병암정은 진사 김현규를 우모해 후손이 세웠고 유정문이 기문을 지었다. 김현규는 산북 서중리에 살면서 평소에 월방산 자락의 선산 성묘길을 자주 다녔는데 정자 터가 좋아 이곳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자 뒤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어 ‘병암정’이라 칭했다고 한다.신라시대 때 조성된 봉덕사는 문경시 호계면 봉서리 63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오래전 폐사돼 자료가 거의 없고 석탑, 좌불, 입불 등만 일부 남아있다. 봉서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봉덕사 절터가 있던 곳으로, 탑의 높이는 4.58m 규모로 일제 말기 사리구 절취단에 의해 도괴돼 있던 것을 1991년 10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 탑은 지대석이 생략된 특수한 구조로 단층기단 위의 갑석은 한 변의 길이가 206cm인 1매의 대형판석을 놓았으며 갑석 상면에는 초층옥신 받침석을 고정시키는 흠이 있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탑내 사리구는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65년 한일 문화재 협정에 의해 반환됐으며 현재 청자완 목제사리함 수정사리호, 자색비단 등 11점의 사리구 유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죽림정이 있는 우로리는 마을 뒷산 지형이 늙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우로실’, 또는 ‘우로곡’이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역골, 주진, 도덕골을 합쳐 ‘우로리’라 명명하면서 호계면으로 편입시켰다.
죽림정은 우로2리 뱃나들 마을 서쪽의 영강변에 자리한 정자다. 정자의 후면은 경사진 바위산이고 서쪽 강가에는 해묵은 회나무가 풍치를 돋우고 있다. 정자 앞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자리잡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전면 기둥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전면의 퇴칸은 누마루를 이루게 했다. 죽림정은 통훈대부 공조참의 정방시(1607~1684)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청주정씨의 정자다. 초창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5년 증건해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오고 있다. 광복 후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학동들이 한학을 배우는 서당 역할을 했고 주변 선비들이 시회를 열었다고 전해진다.태봉산 정상 고려시대 유적인 태실이 있는 견탄리는 임진왜란 이전 정희우라는 선비가 경기도 용인군에서 이곳으로 낙향해 개척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태봉리를 병합, ‘견탄리’라 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 냇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어 개들이 자주 가서 헤엄 치며 놀았다 해서 ‘견탄’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견탄2리 마을 뒷산 정상에 있는 태실은 먼 옛날 태실이 1차 도굴 됐고 광복 이후에 태실이 재차 도굴이 돼 지금은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있다. 석실은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m, 두께는 15cm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석실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으나 덮개는 두 동강이 나서 석실 옆에 버려져 있다. 석실 덮개는 다듬지 않은 지붕형태의 자연석으로 돼 있으며 견탄2리 태봉의 태실은 고려시대 태실로 추정하고 있다.이외에도 경주정씨 재실인 영모재(견탄길 26-9)와 농산정(상무로 491), 추원재(연역길 38)가 있다. 추원재는 청주정씨 문경입향조 정천심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청주정씨 재사다. 정천심은 1640년경 안동 풍산에서 문경의 우로동으로 이거해 문경의 입향조가 된다. 정천심의 아버지는 정훈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다. 임란공신인 약포 정탁이 공의 삼종숙이다. 청주정씨 문경 입향조 비문을 보면 정천심이 타개하자 그 소식을 들은 약포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 한걸음에 달려와 비통해 했다고 한다.농산정은 영강이 내려다 보이는 뱃나들 마을 초입의 우측 산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김세발을 추모해 후손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의 형태다. 우측 블럭담장 사이에는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하게 했다.
김진영 면장은 “호계면은 찬란한 기품과 무한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며 “문경시와 인접해 있어 시책 방향과 함께 공존·상생하는 호계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고 말했다.김 면장은 “호계면민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며 “주민들과 지역 단체장들과의 협조도 굉장히 잘 돼 있어 앞으로도 꾸준히 소통하면서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