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군의 관문인 성산면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와 연접해있고 중부내륙고속도로, 광주대구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로써 물류, 유통, 생산 등 다수의 기업체가 입주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고장이다.
 
굽이쳐 흘러가는 낙동강을 끼고 있으며 특히 농업가구의 28%가 시설작물(멜론·참외) 재배에 종사하고 있어 농가 소득이 높으며 대표 특산물 브랜드인 ‘물길 따라 성산 멜론’을 전국 대도시에 출하하고 있다.또한 별뫼공원, 봉화산 전망대, 낙강칠현 낭만공원, 사망정, 추원재, 경효재, 성산일월정 등 유서깊은 문화관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성산면은 신라시대 때 일리현에 속했다가 경덕왕 때 성산향이 됐고 고려 초기에는 가리현이라 불렸다. 현종 때에는 성주목에 소속됐다가 조선 중엽 이후 가현면으로 개칭돼 13개 동리를 관할했다. 1906년 고령군에 편입된 이후 군·면 통폐합에 의해 성주군 소야면, 도장면과 고령군 구음면을 병합해 지금의 성산면이 됐다.
현재 14개 법정리와 17개 행정리, 62개 반, 33개 자연부락이 있으며 2024년 11월 기준 1504세대에 2483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요 소득원인 멜론 재배 현황으로는 올 한해 전체 68농가(재배면적 55ha)에서 수확량은 828톤으로 집계됐다. 마을 유래에 따르면 성산면 강정리는 조선 중엽 한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 수년 후 마을 뒷산 기슭인 낙동강 수변에 정각을 짓고 글 공부를 했다고 전해지며 강변에 정각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강정’이라 부르게 됐다.강정리에 소재한 봉화산은 대구로 가는 국도에서 약 10km 떨어진 낙동강 서안의 충적평지에 돌출된 작고 봉긋한 야산으로 해발 170m의 산 정상에서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봉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북쪽으로 평지를 지나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박곡리 고분군이 있다.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터로 추정되는 타원형의 석축이 남아있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유물이 출토됐다. 말응덕산 봉수는 현풍 소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대구 화원유원지에 있는 성산봉수로 전달하는 임무를 가진 봉수다.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여러 봉수 노선 중 낙동강을 따라 부산 가덕도 천성보에서 성주 각산봉수까지 전달됐고 그곳에서 다른 봉수와 합해져 서울로 전달되는 제2로 간봉 6의 10번째 봉수에 해당된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봉화산 정비사업을 통해 봉화산성을 조사·정비했으며 북쪽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봉수대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봉화산성은 고령의 관문에 위치한 봉화산 정상에 대가야시대 국경의 방어를 목적으로 돌아 쌓아 축조한 태뫼식 산성이다.
산꼭대기에 태를 두르듯이 돌을 쌓은 모양으로 발굴조사된 성벽은 20cm 정도이지만, 전체규모는 길이 700m, 높이 3m, 폭 3.5m 정도로 추정된다. 산성의 성벽은 산비탈의 자연 경사면에 의지해 바깥면은 다듬은 돌을 쌓고 그 뒤쪽은 막돌을 채워 쌓은 편축식 구조다.성 내부에서는 군사들이 마실 물을 저장해뒀던 원형 집수지도 확인됐다. 이 산성을 축조한 목적은 강 건너 대구방면에 위치한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산성 북동편 성산면 박곡동 산기슭에 ‘박곡동 고분군’이 조성돼 있는데, 이 산성을 지키던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봉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가볍게 산책하다보면 낙동강의 수려한 경관과 고령의 너른 들판을 감상할 수 있고 각종 나무와 야생화를 감상하다보면 봉화산 정상에 유적터를 볼 수 있으며 낙강칠현 낭만공원(사망정)에 이른다.
낙강칠현은 ‘낙동강 유역의 7현인’을 일컫는 말이다. 7현인 이기춘, 이승, 이홍우, 정구, 김면, 박성, 이홍량은 임진왜란 같은 국난 과정에서 목숨을 바치고 싸우기도 했으나 낙동강 개산포에 배를 띄우며 우정에 넘치는 시를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벗과의 정감을 노래해 현인으로 불려지고 있다.사망정은 광산인 이홍량을 위한 정각으로 헌종 때 건립됐으나 낙동대교 가설로 1981년 삼대리 봉화산으로 이건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좌우 각 1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가운데 2칸은 대청을 두었다. 전면 길이 방향으로 길게 반 칸은 마루를 내었고 여기에 문풍지문을 달았다.이홍량은 광산인 근생의 현손으로 선조 원년에 진사가 됐으며 공능참봉으로 천거됐으나 이를 거절하고 학문을 연마하다 선조 25년에 생을 마감했다. 
고분 사묘인 추원재와 화곡 김성의 재실인 경효재가 있는 삼대 1리는 임진왜란 전후 1470년경 김녕김씨가 이 마을 개척 입주할 때 무봉산, 수만산, 수리봉산 3곳의 산 밑에 산다고 ‘삼산’이라 불렸다. 이후 ‘삼대’로 불리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삼대, 반장, 멍더미를 합해 삼대라 동명을 지었다. 또한 김녕김씨와 광산이씨, 김해김씨가 부락의 주구성원이 되자 삼성이 모여 발전을 기약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삼대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추원재는 광산이씨 성주계파 후손들이 선조인 묘제공과 동호를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좌우측에 1칸 반씩 온돌방을 만들었고 가운데 1칸은 대청을 놓았다. 정면으로 길게 반 칸은 마루를 내고 좌우측에도 약간의 공간을 두어 툇마루를 내었다. 특히 추원재의 벽장 속에서 발견된 목판은 추후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경효재는 김녕인 화곡 김성(강릉 참봉)을 위한 재실로 1616년에 건립했다가 1969년 다시 중건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좌우 1칸씩 온돌방을 만들었고 가운데 2칸은 대청을 놓았으며 전면의 긴 반칸은 마루를 내었다.한편 화곡 김성은 임진난 때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로 피난해 정착하면서 삼대문중의 입향조가 됐다. 묘는 경북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 화전등상 무좌에 배위인 안동권씨와 합봉으로 모시고 있다. 
오곡리는 오곡, 신곡, 뱃가라 부르는 3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돼 있으며 마을이 다섯 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오곡’이라고도 한다. 오곡리에는 조선시대 사묘인 소야재와 오봉재, 봉오재, 망미재 등이 있다. 소야재는 중추부사를 지낸 함안인 조영태가 만년에 고향에서 많은 덕을 쌓았음을 기리기 위해 후손 기승이 1977년에 건립했다.  
석성철 면장은 “성산면은 산업단지와 사업체가 지속적으로 건설되고 늘어나고 있다”며 “동고령 IC와 인접한 곳에 민간사업자가 ‘동고령 물류단지’를 조성 중에 있고 물류단지는 2025년 완공 예정으로 물류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앞으로 고령군 산업변화의 중심에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석 면장은 “지금까지 농사 지으며 살아온 지역민과 새롭게 유입되는 사업체 종사자들이 서로 도우며 화합하는 살기좋은 지역 사회가 되도록 면 직원들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