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번지에 가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제56대 경순왕의 묘소가 있다. 경순왕이 즉위할 당시 한반도는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있는 후삼국 시대였다. 신라는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점차 줄어들었고 국가의 기능이 거의 마비가 된 와중에도 귀족들의 권력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경순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되살리기는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고한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 이에 대해 경주김씨(경순왕 후손) 후예들의 의견은 한결같다.
일부 사학자들은 항복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항복이 아니고 양국(讓國)으로 불려야 하며, 군왕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백성들을 생각하여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난 높은 뜻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927년 경주 포석정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되고 자신(경순왕)을 왕위에 앉혔으나 그는 끝까지 마다하고 도량이 넓은 왕건에게 나라를 맡겼다. 경순왕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차마(車馬)가 30여 리에 뻗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후에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다.
경순왕이 978년(고려 경종 3)에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다 능을 마련하였고, 이 능은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조선 영조 23년(1747)에 다시 찾아 재정비하였다.
원래 경순왕은 사망 후 본토인 경주로 내려가기 위해 나섰으나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나와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는 쓸 수 없다"고 하여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권을 확립해 가던 고려가 경주에서 치러질 장례로 자칫 민심이 동요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릉은 남방한계선의 군사지역 안에 있어 답사를 할 수 없는 곳이었다가 2005년 말부터 개방해 지금은 관광객들이 드나들 수가 있다.
묘소 앞 경순왕릉 비에는 장단 남쪽 고부8리 계좌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있어 이곳이 남향임을 알 수가 있다. 경순왕릉의 풍수입지를 두고 일부에서는 성거산(聖居山) 품 안의 아늑한 금계포란(金鷄抱卵)형 혹은 모란개화형(牡丹開花形)의 명당 터로 해석하고 있으나 실제 현장에 올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사신사는 나름 갖추었으나 그 높이가 낮아 완전한 장풍국(藏風局)이 되어주지 못하고, 특히 용·호의 끝자락이 혈처를 감싸주지 못하고 비주(飛走)하는 형상이다. 수세에 있어서도 앞쪽의 임진강물이 약간의 거리감은 있으나 반궁수(反弓水)를 이루는 곳이고 물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수구가 훤히 내다보인다.
풍수서 「地理五訣」에서는 "열 개의 천혈(賤穴) 중에 아홉 개는 반궁이다."라고 하였으니 풍수에서는 주변에서 흐르는 물의 형세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풍수를 전적으로 믿었던 태조 왕건이 신라의 부활을 막기 위한 계락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