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초인 30대에 상경하여 서울 종로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정교사를 역임하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하여 두 개의 학위를 취득하고 38세에 여자고등학교 교감을 발령받아 두 해 근무한 후 81년 초에 대학교수로 환향하였다.
계고(稽考)해 보면 그 10년이란 세월은 지나온 삶의 한 단위 중에서 참으로 바쁘게 생활해온 기간이었다.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 경주를 떠날 때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태어나 자란 경주가 대대로 살아온 세거지이고 선영이 있는 고도이기에 그것을 버리고 다시 환귀본향(還歸本鄕)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학약무성사불환(學若無成死不還)'이라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나갈 때 만약에 배움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 고 외국 유학을 떠났던 선인(先人)들이 남긴 비장한 각오의 말씀을 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8년 동안 밤에 그룹과외를 하면서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5시간의 밤잠을 제외하면 나머지 20시간은 연구하고 가르치며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고향에 내려오니 맑은 공기와 여유 있는 도시공간이 너무도 좋았다. 소원(疎遠)했던 친구와 선후배를 찾아보며 다시 인연의 네트워크를 복원해 보았다.
그 중에서 1981년 8월 15일에 오릉초등학교총동창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맡은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해 주었다. 1949년 10월 1일에 개교하여 60년 만에 수학 아동 소멸로 인해 299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유감스럽게도 폐교를 하게 되었다.
일제의 폭정으로 억압 받았던 한을 풀기 위해 마을 유지들이 전답과 희사금을 쾌척하여 월남국민등학교(오릉초등학교 전신)을 설립했던 것인데, 2009년에 교문을 닫게 되었으니 어찌 앙천(仰天) 통곡하지 않을 수 있으리.
그렇지만 졸업생들은 동창회를 통해 매년 2, 3차례 모임을 갖고 정분을 나누고 있으니 그 참마음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해에도 지난 8월 15일 The-K 호텔에서 제42회 정기총회를 가졌다.
300명에 육박하는 동문들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밝은 안색과 깨끗한 복장이며 자발적으로 많은 찬조금을 쾌척하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유족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고급 악기를 다루며 유쾌하게 불러주는 동문이며, 기성 가수를 능가하는 듯 기별로 흥겨운 가무를 연출해 주어서 비록 호텔 밖은 고온의 폭염이 쏟아지고 있지만 회의장은 최상의 피서지였다.
한 교실에서 같은 창을 바라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동창(同窓)이라 부르고, 선후배가 같은 교문을 드나들었다고 동문(同門)이라 칭한다고 한다. 초등학교일 경우 재학시절 6년 동안 간혹 선후배의 대면 기회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비록 친면이 없었다 할지라도 형과 누나의 모습을 닮은 경우가 허다하여 간접적 친분을 느낄 수 있어서 중·고·대학의 동문과는 다른 근접적 호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인간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기체이다. 그 가운데 혈연, 학연을 통한 관계망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 예비군 동원훈련 명을 받고 의정부 소재 훈련장에 갔는데 우연하게도 그 훈련장의 대대장이 초등학교 5년 후배였다. 20여 년 만에 갑자기 천리 타향에서 만났지만 나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형님! 어떻게 여기에 훈련 나왔어요. 그냥 바로 집으로 가십시오."하고 귀가조치를 시켜 주었다.
다른 동료 보기에 민망하였으나 훈련을 받지 않고 걸어 나오면서 후배의 배려 덕택에 대학원 발표 자료를 준비하는 데 시간적 도움이 되었기에 의외로 고맙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조치가 아니라서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그 동문은 전역 후에 인천에서 몇 차례 지방선거에 당선되어서 그 명성으로 모교를 빛내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하였다. 해마다 개최하는 총동창회 정기총회에 몇 년 째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무척 보고 싶은 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