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에서는 사철 가운데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봄은 겨울의 연속이라 추위가 계속되고 여름은 긴 장마와 폭염으로 너무 더워 외출하고 일하기가 힘들다. 더위에 한 풀 꺽인 인체에 새로운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선선한 가을은 온 국민이 기다리는 계절이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맑고 구름없이” 어쩌면 국민의 정서를 듬뿍 담은 애국가의 가사처럼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는 습성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 뜨거운 열기 속에 성장한 과일들이 마지막을 향해 익어가는 결실의 계절-결혼식도 많고, 체육행사도 많고, 여행도 많이 다닌다. 그러나 언제나 풍성함이 있는 것 만은 아니다. 가을을 ‘방황의 계절’이란 한다. 모든 것이 떠난 간 것처럼 쓸쓸하고 허전함이 우리의 주변을 엄습하고 있다. 일년 중 어느 꽃 보다도 더 아름다운 단풍이 온 산야를 태우고 있다. 짙은 서리가 시작되는 11월에 잎을 떨군 나목의 감나무, 시골 시와집 뒤뜰의 앙상한 가지 끝에 촘촘히 달린 빨간 열매들이 한 해의 계절이 가고 있음을 먼저 알리고 있다. 만추의 들녘에 억새물결이 넘실대고 파란 하늘이 지난 여름 동쪽바다를 연상케하는 가을 들판으로 나서면 바닷바람이 차갑게 느껴진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참 많아진다고 한다. 가을 남기고 간 사람, 가을에 떠난 시인 릴케의 시 ‘가을날’이 몹시도 생각나는 계절에 와 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방황할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릴케의 ‘가을날’은 가을보다 더 가을색이 완연한 51세세의 나이에 가을을 두고 떠났으며 인생의 가을을 돌아보게 한다. 겨울을 시작을 알리는 늦가을까지 산자락을 타고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풀이 동남풍이라도 불면 마치 물보라의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장관을 이룬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지만 들풀처럼 모질고 길게 이어지는 궁색한 인생길, 억새풀을 바라보는 짧은 시간이나마 지나온 모든일을 잊고 싶다. 북쪽 먼 하늘로 철새떼들이 떠나고 있다. 갑자기 바람이 지기 시작하는 걸 보니 내일 아침에는 하얀 무서리가 내릴 것 같다. 무서리가 내리는 날은 따뜻한 낮이 오기 마련인데…. 손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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