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영지’는 조선후기의 ‘동도칠괴(東都七怪)’와 현대 경주의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이다. 이 ‘삼기팔괴’는 현대에 확정된 개념이고, 조선후기에는 동도칠괴가 있었다. ‘동도칠괴’는 현대의 ‘삼기팔괴’의 최초 버전이다. 본지는 경주 동도칠괴에 대한 학술적 접근과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동국대학교 강석근 교수의 불국영지를 중심으로 한 ‘무영탑 전설 연구’에 관해 소개한다. ◆세계문화유산 불국사 대웅전 마당의 다보탑과 석가탑 불국사 석가탑(국보 21호, 일명 무영탑) 전설의 전승과 변이 과정, 특히 ‘불국영지(佛國影池)’가 가진 의미의 사적 전승과 그 변화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했다. 서기 751년(신라 경덕왕 10) 김대성에 의해 공사가 시작된 후 774년(신라 혜공왕10)에 완성된 불국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서 석굴암과 함께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신라의 석탑을 생각하면 불국사의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이 떠오른다. 대웅전 마당에 서 있는 두 탑은 다른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명작들이다. 다보탑은 여성적이며 아름다운 조형적인 형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석가탑은 날렵하면서도 안정적인 모습과 재미난 전설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감동해 왔다.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등 새로운 문화창조의 요구 불국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화 창조를 요구받고 있다. 무영탑과 외동읍 괘릉리의 ‘영지’ 및 ‘영지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이 관련된 무영탑 이야기는 전래의 전설로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다. 무영탑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며, 불국사와 영지라는 복수의 장소가 배경이며, 아사달의 국적은 당나라와 신라(부여)로 논란이 되고, 아울러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라는 공감대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된다. 많은 관광객들은 무영탑 전설의 자발적인 전파자가 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이 전설을 전파하고 있다. 이는 이야기가 가진 힘이며, 문화콘텐츠의 장점이다. ◆고서에 기록된 무영탑 전설 첫째, 무영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다. 무영탑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전설은 '고금창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경주부사 민주면이 1669년(현종 10)에 간행한 '동경잡기'이다. 이 책의 ‘영제(影堤)’조에는 불국사 뒷산의 나무와 단청이 비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단순한 기록만 남아 있다. 이후 '일성록'과 성대중의 '청성잡기'의 ‘동도칠괴’와, 김영기, 권오찬, 김정균의 경주 ‘삼기팔괴(三奇八怪)’ 가운데 하나인 ‘불국 영지’에도 무영탑 전설의 흔적은 소략하여, 전설의 전체적인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무영탑 전설은 그 서사 구조나 의미가 완전히 변형된 형태이다. ◆석공은 이름 없는 당나라 사람, 그림자가 영지에 비치지 않아서 무영탑 다음은 '고금창기'이다. 이 기록은 내용의 구체성과 시대순으로 보아 가장 대표성을 가진 원형 자료이다. 이 기록에서 석공은 이름이 없는 당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 서라벌로 온 사람은 누이 아사녀(阿斯女)이다. 그리고 석가탑의 그림자가 영지에 비치지 않아서 무영탑이라 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주목할 자료는 초의 의순(草衣 意恂)의 '불국사회고'라는 9수의 연작시이다. 이 시주(詩注)에는 석공은 당인(唐人)이고, 아사는 누이로 그려지지만, 다보탑을 무영탑으로 진술한 점이 특이하다. 위 두 자료에도 비극적인 결말은 없고, 단순히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괴이한 일곱(여덟)가지 이야기의 하나 경주에 전하는 ‘동도칠괴’, 현대의 ‘삼기팔괴’의 하나에 ‘불국영지(佛國影池)’가 있다. 이는 신라의 괴이한 일곱(여덟)가지 이야기의 하나인데, 무영탑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이 후대에 오면서 ‘동도칠괴’, ‘삼기팔괴’의 하나로 변이된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불국영지’가 ‘불국사와 영지’, ‘불국사의 영지’라는 단순한 의미나 불국사의 영지의 풍광이 아름답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광수 오도답파기는 최초로 아사녀의 슬픈 스토리가 전개 이광수의 에 실린 무영탑 전설은 아사녀가 ‘영지에 투신’하는 슬픈 스토리로는 첫 작품이다. 이런 모티프는 이후 오사카 긴타로(오사카 로쿠손)와 현진건에게 이어진다. 따라서 이광수의 이 기록은 '동경잡기', '일성록', '청성잡기', '고금창기'와 초의(草衣)의 '불국사회고'에 나오는 전설과 이후에 나오는 오사카 긴타로, 현진건의 전설을 연결해주는 중간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다. ◆오사카긴타로 영지, 석공과 아사녀의 투신으로 변화 이 무영탑 전설은 일제 강점기에 출간된 오사카 긴타로의 조에 와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후 그의 전설에서, 석공은 이름없는 당인(唐人)이지만, 아사녀는 부인으로 바뀌었다.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석가탑 그림자가 영지에 계속 비치지 아니 하자 투신하고, 부인을 애타게 찾던 석공은 바위에 부인의 모습을 닮은 부처를 조각하고, 끝내 못에 투신하였다. ◆ 현진건 소설 무영탑, 부여사람 아사달과 아사녀 현진건이 1929년 7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도순례 경주'의 은 '고금창기', 오사카 긴타로의 전설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현진건은 1938년 7월부터 다음해까지 장편소설 '무영탑'을 '동아일보'에 연재했고, 1941년에는 '무영탑'을 소설집으로 간행하였다. 이 작품은 을 다시 고친 창작이다. 현진건은 이 소설에서 석공과 부인을 부여 사람으로 묘사하고, 석공의 이름은 아사달(阿斯怛)이라 하였다. 아울러 서사구조를 복잡한 장편 소설로 각색하고, 귀족의 딸인 구슬아기를 등장시켜 본격적인 갈등과 파국으로 이어지는 애정 소설로 완성하였다. 현진건의 성향이 민족주의적으로 바뀌면서 석공은 당나라 사람이 아닌 부여 사람으로 설정되었다. 현진건은 소설 '무영탑'을 통해 ‘전설’ 속의 석공의 이야기를 사랑과 예술에 얽힌 아름답고 슬픈 비극적 로맨스로 승화시켰다. ◆신동엽 시 아사녀, 외세배격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는 민중을 상징 현진건 이후 아사녀와 아사달에 천착한 시인은 신동엽이다. 1960년 혁명시 '아사녀'를 '학생혁명시집'에 발표하였고, 1968년 5월에는 오페레타(operetta) '석가탑', 전(全) 5경(景)을 창작하여, 드라마센타에서 공연하였다. 신동엽에게 아사달과 아사녀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민중을 상징한다.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시인 신동엽은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阿斯怛)에서 아사달(阿斯達)로 변경 정착시켜, 민중의 상징적 인물로 삼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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